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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생각

손을 잡아주는 엄마가 있어서 길을 떠난다.

강릉대도호부 관아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사용되던 객사터라고 한다. 즉 중앙 관리들이 강릉에 오게 되면 머물던 건물터를 말한다.  그곳에서 평창 동계 올림픽 기간동안 관광객들을 위한 체험 부스를 마련해 놓았기에 지나는 길에 한번 들러보았다. 


투호, 고리던지기, 제기차기, 윷놀이, 널뛰기, 한복입기, 뱃지 만들기, 탁본하기, 캘러그래피 하기 등등 체험때마다 나눠 준 종이에 도장을 찍으면 뜨거운 어묵국과 복조리 세트를 선물로 준다고 했다. 사실 날씨가 너무 추워 체험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런데 이미 평창 올림픽 경기장 안을 구경할 때마다 체험 부스에서 온갖 뱃지와 사은품을 선물로 받는 재미에 흠뻑 빠져버린 딸아이가 이런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딸아이가 좋아하니 친정엄마도 하자고 하신다. 엄마인 나만 비협조적이라고 비난받는다. 그래서 외할머니, 엄마, 손녀딸 이렇게 3대가 고리를 던지고 제기를 차며 도장을 받으러 돌아다녔다. 


마침 실내에서 따끈한 차와 한과를 맛볼 수 있는 체험이 있다고 하여 발길을 옮겼다. 언 몸을 녹이는데 작은 찻잔에 담긴 차 한잔만으로도 충분했다. 차를 우려 따라주는 다도선생님께 우리 세모녀는 차 마시는 방법을 배웠다. 


첫째, 찻잔을 들어 배꼽 위치에 대며 색을 눈으로 바라본다. - 시각

둘째, 찻잔을 들어 코의 위치에 대며 향을 맡는다.            - 후각

셋째, 찻잔을 들어 입술에 대며 천천히 마신다.                - 미각


차는 찻잔을 덥석 잡아 후후 불며 마시는 것이 아니란다. 찻잔 역시 한 손으로 감싸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아랫부분을 받치고 마시는 것이 여러모로 보기에도 좋다고 들었다. 

차 한잔이라도 시각과 후각, 미각을 동원하여 마시는 법이 따로 있고, 그 법을 따르는 순간 여유를 느끼며 사색에 잠길 수도 있다는 것을 배웠다.


80대의 노모, 40대의 딸, 10대 손녀딸...

우리는 작년 7월부터 올해 2월까지 4번이나 같이 여행을 다녔다. 태국, 정선, 제주, 강릉.

물론 그 이전에도 여러 번 같이 다녔지만.... 6개월 남짓 기간 동안 집중적으로 여행을 다닌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여행을 다닐때마다 다른 가족들의 동행 여부에 따라 의견이 각기 달랐던 적도 있었고, 어떤 때는 짜증이 나기도 했었고, 딸아이의 변덕이 죽끓듯 해서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을 때도 있었다. 


그런데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며칠이 지나고 보면...

여행할 때의 그 소소한 이야깃거리들이 그렇게 재미나고 우스울 수가 없다. 

80 노모인 친정엄마는 여전히 건강하시고, 40대 딸인 나보다 더 잘 걸으며,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넘쳐흐르신다. 엄마의 건강이 허락되는 한 언니들과 내 딸과 함께 어디든지 훌쩍 길을 떠나보려 한다. 서로의 손을 잡고 힘이 되어 주면서 먼 길도 마다않고 떠나보려 한다. 


삶이 장난을 걸어올 때마다 곤이는 자주 생각했다고 한다. 인생이란, 손을 잡아 주던 엄마가 갑자기 사라지는 것과 같다고. 잡으려 해도 결국 자기는 버림받을 거라고.    -   손원평 <아몬드>



손원평의 <아몬드>에 나오는 곤이는 감정을 조절하는 뇌의 편도체 이상으로 평범한 사람과는 다른 삶을 사는 아이이다. 감정을 느낄 수 없기에 모든 상황에 대해 일일이 엄마가 예를 들고 그에 적합한 감정을 모범답안처럼 말해준다. 싱글맘 엄마와 감정조절 장애를 겪는 아들, 그리고 그들과 화해 후 함께 사는 외할머니.... 

외할머니와 엄마는 세상에 맞서 곤이를 지켜내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지만 어느 날 불행이 갑작스레 다가오는데... 묻지마 살인 사건으로 인해 외할머니는 사망하고 엄마는 식물인간이 되어 버린다. 세상에는 어떤 감정도 혼자의 힘으로 느낄 수 없는 곤이만을 남겨둔채..... 그때 곤이는 생각한다. 인생이란 손을 잡아주던 엄마가 갑자기 사라지는 것과 같다고.... 그렇다. 인생은 그렇게 힘든 거다.


살면서 시시각각 벽을 만날 때가 많았다. 이 나이쯤 되었으니 혼자 해결해도 되지 않나? 생각했던 순간들이 무색하게 힘들고 버거웠다. 그럴때면 늘 엄마가 내 손을 잡아주었다. 살다보면 40대 후반의 딸도 80세 엄마가 필요한 순간들이 불쑥불쑥 찾아온다. 그러니 10대 사춘기 소녀인 내 딸이 언제라도 나를 부르면 당장 달려갈 수 있도록.... 나는 내 아이가 찾기 쉬운 그곳에 앉아 하염없이 기다리리라. 건강하게 정신 바짝 차리고.


손을 잡아주는 엄마가 있어서 내 인생이 겪어볼만 했던 것처럼...

내 딸의 손을 잡고, 딸 아이가 자신의 인생을 당당하게 살아낼 수 있도록...

우리는 길을 떠 날 거다.

모녀 3대의 여행을 계속하며... 




뭐든 배우기 좋아하는 나이 여든의 엄마는 무엇하나 허투로 듣지 않는다. 그런 삶의 자세를 내가 배우고 싶고, 잘 배워놨다가 내 딸에게 전해주고 싶다. 셋이 나란히 자리에 앉아 차 한잔씩을 다도의 방식대로 마시는 그 날... 

참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