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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생각

낡은 것들과의 결별


내 휴대폰은 만 4년 6개월이 된 갤럭시 노트 3이다. 1년 반만 지나도 온갖 혜택을 주면서 새 휴대폰으로 교체하라는 문자가 이틀에 한번 꼴로 오는 요즘에... 오래된 휴대폰을 끼고 돌부처처럼 꼼짝도 않는 나는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 맞는 것도 같다. 그 숱한 폰 교체 권유 전화에도 나는 늘 '아직 쓸만하다.앱 새로 깔기 귀찮다.'는 이유를 대며 고집을 피웠었다. 그렇게 한결같은 우직함을 보였더니 어느 순간부터 권유 전화가 거짓말처럼 한통도 걸려오지 않았다. 귓구멍이 막힌 여자로 블랙리스트에 올라갔을지도 모른다.


귓구멍이 막혔을지는 몰라도 나는 아직 눈도 그럭저럭 보이고, 감각도 얼추 예민한 축에 속하고, 외모는 또래에 비해 꽤나 젊은 편이다. 나 미쳤나봐....쿨럭~


어쨌든 나는 감각이 얼추 예민해서 세련된 제품을 선호하긴 하지만, 갤럭시 노트 3가 그닥 촌스럽게 보이지도 않았기에 불만없이 동고동락해왔다. 그런데 요 근래 와서 상황이 나빠졌다. 이 녀석이 카메라 셔터를 몇 차례씩 눌러도 무반응으로 대응을 하고, 다른 화면으로 바뀔 때에는 최소 3-4초 이상 밍기적대며 늑장까지 부리는 것이다. 성질 급한 사람은 절대 쓸 수 없는 늙고 낡은 휴대폰이 되어버렸다. 


휴대폰을 계속 사용하면서 나는 내 안에 나도 모르는 '나'가 여럿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성질은 급하되 미련이 많은 인간이었다. 나는 예민하면서도 때에 따라 하염없이 둔한 인간이었고, 외모는 자칭 젊어보인다 박박 우겨대지만 끝간데없이 노화한 인간이었다. 그래서 폰교체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던히 그 긴 시간을 낡은 휴대폰을 끌어안고 살아왔던 거다. 


적당한 때에 폰을 교체했더라면..나는 지난번 여행때 담고 싶은 풍경과 순간을 더 많이 사진으로 남겼을지 모른다. 사진들을 보며 당시를 추억하고 그 즈음의 내 생각들을 정리해 보는 시간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느린 화면 전환탓에 검색도 대충하고 초행길에 나섰다가 헤메이는 일도 없었을지 모른다. 휴대폰을 손에 든 채로 길 가는 사람 붙잡고 '여기는 어떻게 가는 거예요?' 이렇게 물으며 한심한 여자로 취급 받는 일 따위도 없었을 것이다. 


이리저리 생각해봐도, 나의 미련과 나의 둔함과 나의 늙음은 못내 아쉽다. 참 별로이다. 내가 나의 이런 성향을 별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런 지지부진한 나의 아둔함이 휴대폰같은 물건에만 국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지나간 힘든 것들과 더불어 사람들에 대한 전방위적인 미련, 반추, 후회, 뒤적거림 등등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낡은 휴대폰을 교체하지 못한 결정적 이유는.... 휴대폰 안에 그대로 저장되어 있는 수많은 문자와 카톡 메시지 때문이었다. 문자와 카톡에는 나를 힘들고 좌절에 빠지게 한 사람들과의 대화뿐만 아니라 나를 응원하며 용기를 준 사람들과의 대화도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나는 그 둘을 다 버리지 못했다. 나는 늘 전전긍긍했다. 응원과 지지만을 기억했다면 덜 괴로웠을 시간들이 뭉텅뭉텅 내 앞에서 잘려나가 버렸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낡은 폰을 손에 쥐고 있는 매 순간 질문은 꼬리를 물고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살면서 누구에게도 피해준 적 없었던 것 같은데, 나는 왜 누군가로부터 피해를 입어야 하는 걸까? 왜 잘못한 사람들은 따로 있는데 나에게 사과조차 하지 않는 걸까? 

나를 응원하는 사람들의 말을 믿고 그저 여태까지 살아온 것처럼 앞으로 살아가도 되는 걸까? 나는 정말 좋은 사람으로 인생을 잘 살 수 있을까?


끝도 없는 불안의 질문들이 이어질 때 방법은 단 하나다. 나로부터 그 불안을 떼내어 버리는 것. 그 상황에서 훌쩍 뛰어나와 다른 상황으로 순간이동해 버리는 것. 

나는 그 방법으로 낡은 폰과 이별을 했다. 오랜 시간의 힘든 순간들이 메모리 되어 있는 낡은 폰을 이제는 놓아주기로 했다. 물리적 결별을 통해서 질기게 매달려 있는 나쁜 기억들을, 음습한 불안들을 더 이상은 떠올리지 않기로 했다. 

우리는 헤어졌다.


안녕! 나의 낡은 폰.

그동안 내 곁에서, 나만큼 나를 자세하고도 깊숙이 들여다보았을 너. 

오늘 너와 헤어지지만 긴 시간을 공유한 너에게 고마웠다는 인사를 전할게. 

이제 내 책상 서랍 속에서 푹 쉬렴. 그동안 단 한번의 휴식도 없이 고생 많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