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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생각

열공만 하지는 말자!


그 옛날 고등학교때부터 아트박스에 들러 구경하는 걸 좋아했었다. 당시에는 예쁜 모양의 편지지와 카드, 펜, 필통,노트 등을 구입하는 게 낙이었다. 그 곳에서 샀던 수많은 편지지와 크리스마스 카드에 사연을 담아 친한 친구들과 주거니 받거니 한 기억은 지금도 여전하다. 친구의 편지를 받으면 조심스레 펼쳐놓고 그 내용에 적합한 이야기를 나만의 어투로 답장에 담아내려고 밤새도록 머리와 펜을 굴리곤 했었다. 

내 취향대로 편지지를 고를 수 있었던 아트박스는 나에게 잊지못할 추억의 장소이다.


그 아트박스가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건재하다는 사실은 참 반가운 일이다. 학교 근처 문구점조차 많이 사라진 지금. 길 가다가도 아트박스를 발견하면 딸아이보다 내가 먼저 달려가기 일쑤였다. 그곳에서 필기구, 편지지, 작은 수첩등을 보면 지금도 나는 가슴이 설렌다. 


세월이 흘러 진화한 아트박스에서는 그옛날 물건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다양한 물건들을 판다. 없는 게 없을 정도로 많은 물건들 중에서 딸아이가 고른 물건은... 예상을 뒤엎는 '열공하자!' 스티커.

너, 무슨 의도로 이런 스티커를 산 거니? 

열공의 뜻을 모르지는 않잖아? 

이런 걸 사서 내가 자꾸만 너한테 기대하면 부담스럽지는 않고?


딸아이는 그 스티커를 책상 위에 떡하니 붙여 놓았다. 물론 스티커를 붙였다고 해서 열공한 적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책상 위는 늘 어지러웠고, 책이나 참고서 보다는 온갖 잡동사니들이 더 많았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책상위를 깔끔하게 치우더니 어쩌다 한번씩은 책상 의자를 빼고 앉아 공부를 하기도 한다. 


열공하자! 스티커 아래에는 로션, 토핑팩, 인형, 섀도우, 렌즈통등이 조물조물 놓여있다. 완벽한 열공모드라고는 볼 수 없는 환경일지도 모른다. 딸아이는 지금도 여전히 자신의 책상보다는 주방 식탁에서 책을 읽거나, 문제집을 푸는 걸 더 좋아한다. 그래서 내가 딸아이 책상을 종종 이용하는데, 나는 우리 딸의 책상이 마음에 든다. 열공하자! 선언해 놓고도 인형 한번 만지고, 크림 한번 찍어 바르고, 렌즈 끼어 보기도 하고, 섀도우 칠도 해보는....

딸아이의 조금은 정신없는 번잡스러움이 다 이해된다.


돌이켜보면 나의 10대 시절은 공부 시간 아주 조금에 대부분이 까불고 놀고 편지 쓰던 일들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요즘은 어디 그런가? 공부, 시험, 수행평가의 연속이다. 시험 결과가 나오고 순위가 가려지는 경쟁체제 속에서 학창시절의 쓸모없어 보이는 호기심, 이유없는 게으름, 나른하기만 한 멍때림이 용인될 수 있을까? 편지를 주고 받으며 마음을 나누고 위로를 전해 줄 친구 하나 제대로 사귈 여건이 될까? 


딸아... 열공하지 마라! 공부만 하느라 세상 한 번 돌아볼 여유가 없다면 인생 너무 갑갑하잖아... 

인형가지고 놀고, 로션도 바르고, 1일 1팩도 하고, 컬러렌즈도 한번 끼어보렴. 안되는 일이 뭐가 있을까? 네가 하고 싶은 모든 일은 좋은 일이고 좋은 경험이라고 나는 믿는다. 네 마음이 시키는, 하고 싶은 일을... 공부해야 한다는 강박관념때문에 뒤로 미루지는 마라. 나는 네가 행복한 사람이길 바라지, 뭔가를 잘 하는 사람이길 바라는 게 아니란다. 네 인생이 재미나고 즐거웠으면 좋겠다. 무엇 때문에, 누구 때문에 네 삶이 우울해지는 건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어. 너는 너무나도 예쁘고 꿈많은 십대 소녀라는 걸 기억하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