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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생각

냉장고에서 적정 용량을 배우다.

며칠 째 지방에 머무르는 지금.

집을 떠나오기 직전 마지막 점검을 하며 냉장고 문을 열었다가 그대로 다시 닫았다. 그 길로 나는 그냥 아무것도 못 본채 하면서 집을 나섰다. 음식들을 정리하고 냉장고 속을 간결하게 해주는 일은 다른 나라 사람들의 이야기인냥 생각하기로 했다. 

'괜찮아. 성능 좋은 냉장고인데 뭘.'


냉장고는 참 희한한 물건이다. 가방도 비닐봉지도 무엇인가를 넣으면 더 이상 들어가지 않는 최대 용량이라는 것이 있는데... 나한테 있어서 냉장고는 뭐든 꾸역꾸역 잘도 들어가는, 한계라는 것을 모르는 요상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뭐든 한 번 들어가면 제때 나오지도 않는다. 물건들은 어느 구석에 숨어있었는지 늘 유통기한을 한참 넘기고 나서야 고개를 불쑥 내민다. 숨바꼭질하는 어린애가 '까꿍'하고 나타나는 것처럼.


냉장고 속에는 온갖 채소와 과일, 반찬과 소스류, 유제품등이 한데 섞여 군락을 형성하고 있다. 냉동실은 또 어떻고... 거기에 있는 물건들은 주로 얼음덩어리로 존재한다. 한 덩치하는 정체모를 녀석과 마주하면 참 난감하다. 

'널 녹여 먹여야 하나? 쪄 먹어야 하나? 평생을 덩어리로 모셔두어야 하나?'


우리집 식구 세명에 냉장고 용량은 800리터가 넘는다. 예전엔 몰랐다. 뭐든 크면 좋고, 기왕 가전제품을 바꿀때는 최신형에 크기도 큰 것으로 하자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요리실력도 젬병이어서 그 큰 냉장고 안에 질좋은 재료들이 있다고 해도 그림의 떡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으면서.... 나는 무슨 욕심을 그리도 냈을까?


냉장고만 큰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TV도 크고, 에어컨도 크고, 세탁기도 크다. 평생 다시는 냉장고, TV, 에어컨, 세탁기 근처에도 가 볼 수 없을 것이라는 불안감이 내재되지 않고서야 그렇게 큰 용량들을 선택했을 리 없다. 그런 물건들을 구입할 당시에는 몰랐다. 그것들이 내게 너무 커서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냉장고의 적정 용량은 1인당 40리터라는 얘기를 듣고 놀랐다. 그러니 우리 집냉장고는 120리터 정도면 적당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7배가 넘는 거대한 냉장고가 버티고 있다. 그 속의 음식들은 딱히 먹고 싶을만한 상태를 유지하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싸다고 사놓고, 필요할 것이라 여기며 사놓고, 때가 되면 언젠가 먹겠지 하면서 못 버리고 쌓아두고....

냉장고 속 상태가 내 생활 상태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아서 심란할 때가 많다.


한번씩 정리하며 간소화 작업을 하지만, 얼마 못가 또 다시 차오르기 시작하는 냉장고는.... 참 희한한 물건이다. 아니 그 속을 자꾸만 채우려는 내가 더 희한한 인간일지도 모르겠다. 냉장고 속을 채우려는 그 까닭없는 불안감을, 그 에너지를 모아 내 안을 채우면 훨씬 생산적일텐데...


자신의 정체성은 소비가 아니라 생산에 의해 규정된다고 한다. 냉장고 용량은 최소화하면서 내 머릿속과 마음속 용량은 최대치를 꿈꾸며 생활할때...나는 지금보다 조금은 더 생산적인 인간, 단단한 정체성을 지닌 인간이 되어 있지 않을까? 


사실 요새 날씨도 무지하게 추워서 냉장고 속 반찬들을 싹 꺼내서 베란다에 놓아두면 냉장고를 켜둘 필요도 없으니 전기요금 절약도 될 것이다. 문제는 냉장고 속 꺼내야 할 불필요한 무언가의 정체를 맞닥뜨리기가 두렵다는 거다. 나 지금 떨고 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