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에서 하얀 눈이 흩날리는데
구 바깥은 온통 여름일 누군가의 시차를 상상했다."
풍경이, 계절이, 세상이 우리만 빼고 자전하는 듯
시간은 끊임없이 앞을 향해 뻗어나가는데
어느 한 순간에 붙들린 채 제자리에 멈춰 설 수밖에 없을 때,
그때 우리는 어디로 갈 수 있을까.
김애란 바깥은 여름 <풍경의 쓸모>
아이의 초등학교 공개 수업 당시.
한 시간 가까이 흐를 즈음
나는
내 아이의 학급 내 쓰임새를 가늠하게 되었다.
선생님의 질문 앞에서
두 손 높이 드는 아이.
자리에서 일어서는 아이.
답변하자마자 다시 손을 드는 아이.
그런 아이들은 두 부류로 정해져 있다.
수업을 주도해 나갈 정도로 똑똑한 아이던지
정답 여부에 상관없이 명랑쾌활한 아이던지.
그 당시
나의 아이는 어느 쪽도 아니었다.
결국
한 시간 가까이
교실 뒷쪽에서
공개 수업을 지켜보는 엄마들 틈바구니에서
한마디도 못하는 내 아이를 지켜보다
화끈거리는 얼굴을 남에게 들킬새라
찬 손바닥으로 연신 두 볼을 눌러 달아오른 열기를 진정시키곤 했다.
나는 그때 왜 그토록 부끄럽고 속상했을까?
그저 그날 하루.
그 한 시간.
내 아이가 다른 아이보다 조금 모자라 보인 것이
그토록 화가 났던 걸까?
솔직히 그런 감정도 조금은 있었던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내 아이는... 누굴 닮아
저렇게 답답할까?
왜 저리 늦될까?
영민은 커녕 아둔할까?
겨우 열 두엇, 열댓살 남짓한 아이의
앞으로의 긴긴 인생 중... 아주 잠깐만을 슬쩍 곁눈질 한 나는
왜 절망하고 좌절했던 걸까?
아이의 공개수업 태도가
앞으로의 아이 인생의 향방을 결정하는데 있어
절대적인 것도 아닌데....
적어도 그 정도는 아는 사람이 바로 나인데...
그런데도 내 속은 어지럽기 그지 없었다.
그 어지러움의 이유는....
아이가 학교 다니는 시간이 쌓여갈수록
내 안에서 명료해졌다.
몇몇의 다른 아이들이 활기찬 여름을 맞이할 때
내 아이만 서늘한 바람앞에 알몸으로 서 있을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내 아이의 존재는
오로지 소수의 특별한 아이들을 위한 배경으로만 쓰이게 될 거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아이들 모두가 각자의 쓰임을 존중받을 것 같았다면
그런 속상함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짧은 시간 동안
그 어린 학생들 사이에서도
능력자와 무능력자로
자신들의 위치가 나뉘어져
각자의 위치를 점령하며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해 보여야 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니 자신의 능력치를 발휘할 수 없었던 아이는
학교 생활 내내 능력자들의 풍경으로서, 배경으로서 존재하는데
익숙해 질 터이다.
나는...
그런 현장을 학부모에게 직접 보게하는
무신경한 학교 공개 수업이 싫다.
최소한
교실내 2-30명 학생이
누구 하나 소외됨없이
누구의 배경으로 전락함 없이
한데 어우러질때
공개 수업의 의미가 있지 않을까?
최소한
학부모를 불러다가 수업을 참관하게 하는 공개수업일때 조차
소외되는 아이는 어쩔 수 없다는
안일한 생각을 하는 교사들이라면...
그들이
평상시 수업시간에
아이들을 어떻게 대할지는....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지 않겠는가.
우리 모두
누구의 배경이 된 채
누구의 웃음과 자랑과 환희를
구경하기만 하러 태어나지는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 주었으면 한다.
우리는 모두 각자 인생에서는
풍경이 아닌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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