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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생각

화내며 살기엔 짧은 인생

 

 

 

 

세네카는 고대 로마 철학을 대표하는 철학가이자 정치인 시인이며 비극작가로 알려져 있다.  공포와 광기의 시대를 살던 그는 자신의 제자이기도 했던 황제 네로에 의해 자살을 명령받고 죽기까지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다. 그는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로서 인간은 올바른 이성으로 행동하며 덕을 추구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런 그에게 '화'는 이성 밖에 놓인 격하고도 잔인한 감정이고, 덕의 반대에 선 악덕이었다. 동생에게 전하는 편지글 형식의 이 책에는 '화'라는 감정의 실체를 낱낱이 분석하여 화없는 인생을 살도록 권유하는 그만의 통찰과 사색이 가득하다. 

 

살면서 화를 한번도 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주 사소한 일에서부터 삶의 근간을 뒤흔드는 엄청난 사건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화를 낼 이유는 지천에 널려 있다고 생각하며 산다.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시시각각 변하고, 경쟁은 치열해지며, 불안하고 불편한 사건 사고는 일단락 지어진 적이 없다. 그러니 화를 내지 않고 산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몇 발짝 옆으로 비켜서 다른 세상을 바라보는 도인이나 종교인의 영역이라고 미루어 버리기 쉽다. 보통의 인간은 화를 내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어야만 덜 괴롭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는 인간의 본성은 화와는 정반대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인간은 무릇 서로 도움을 주고 받고, 서로 이익이 되기를 원하고, 화합을 이루려 하는 마음이 본 바탕에 있으나 화는 오로지 앙갚음에만 집중하여 상대방을 파괴하려 든다. 이런 '화'는 인간의 평화로운 본성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격정이다. 그러므로 선한 사람은 '화'를 내거나 앙갚음을 함으로써 기쁨을 얻는 따위의 일을 하지 않는다. 

 

혹자는 화를 적절하게 통제하여 유지하면 오히려 약해지는 행동이나 마음을 방지할 수 있지 않냐고 묻지만 저자는 단호하다. 화라고 하는 해로운 감정을 받아들여 관리하기 보다는 처음부터 차단해야 한다고. 원래 해로운 것들은 어느 순간 통제하려는 사람의 능력을 뛰어넘을 정도로 강력해지기 때문에 줄어들기 어렵다는 것이다. 애초에 '화의 싹'을 눌러 드러나지 않게 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화를 내다 보면 어느 순간 화가 화를 키우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한번 쏟아져 나와버린 화는 멈출 수도 쓸어담을 수도 없을 정도로 넘실대며 주변 모든 것들을 집어 삼켜 버린다. 그 후에 밀려오는 숱한 자괴감 앞에 우리는 얼마나 초라했던가. 그런데 이런 화는 우리들만의 고민이 아닌 2000년 전에도 여전히 있었기 때문에 (아니, 더 심했다는 생각이 든다) 철학자까지 나서서 위험성을 경고한 것이 아니겠나.. 너무 자책하다가 우울해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려 한다. (이제부터 개선해 나가면 된다. 여태 뭐하고???? 묻지 않으련다)

 

우리의 사고는, 일단 흔들리고 자신의 발판을 잃고 나면 난폭하게 밀치고 들어오는 것에 노예가 되어 끌려다닌다.  어떤 것들은 처음에는 우리가 통제할 수 있지만, 다음 단계에 들어서면 제 스스로의 힘으로 우리를 끌고 다니며 좀체 원상태로 돌아갈 기회를 주지 않는다. (중략) 바로 그렇게 마음이 화, 사랑, 그 밖의 격정에 굴복하고 나면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하고 무작정 돌진하게 된다. 마음 자체의 무게 그리고 아래로 향하려는 악덕의 본성 때문에 백이면 백 마음을 깊은 나락으로 끌고 간다. 44쪽

 

책을 읽다보면 고대 로마인들의 잔혹한 '화' 앞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휴가갔다가 홀로 복귀한 병사를 보고 같이 갔던 동료 병사를 죽였다고 의심해버린 그나이우스 피소는 복귀 병사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다. 그때 동료 병사가 버젓이 살아서 나타나자 피소의 명을 받았던 대장은 복귀 병사의 처형을 멈춘다. 동료 병사의 귀환은 복귀 병사의 처형당해야 할 이유를 사라지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살려줘야 함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나이우스 피소라는 잔인한 작자는 세 명 모두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다. 한명도 아니고, 두명도 아닌 세 명이라고?

 

한 사람의 무죄로 인해 세 명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 격분할 구실을 찾아내는 데 있어서 화는 이 얼마나 능수능란한가!

피소는 말했다. "나는 너에게 사형을 명한다. 너는 이미 사형 선고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는 동료의 단죄에 원인이 되었으므로 사형을 명한다. 또한 너는 처형을 하라는 지휘관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기에 사형을 명한다." 

한 가지 죄도 찾아낼 수 없었기에 그는 세 가지 단죄의 이유를 만들어낸 것이었다.     70쪽 

 

화는 사람을 눈멀고 귀멀게 한다. 어떤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구실이든지 만들어서 모든 것을 망쳐버린다. 화가 무섭고 두려운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는 '화'는 이성으로 극복가능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화는 우리의 의지로써 만들어져 버린 '마음의 잘못'이기 때문이다. 우리 의지 밖의 일이라는 것은 문득 흐르는 눈물이나 찬물을 맞고 덜덜 떠는 것, 낭떠러지에서 아찔해 지는 것등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반응을 말한다. 그것은 멈출 수가 없다.

 

그러나 화는 다르다. 자동반응이 아니기에 경우에 따라 멈출 수도 있는 것이다. 부당한 일을 당해서 복수를 꿈꾸다가도 이성의 힘으로 마음을 가라앉힌다면 그것은 '화'가 아니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그렇게 누그러드는 감정, 이성에 의해 좌우되는 감정은 '마음의 움직임'이라고 부르며, 이성을 뛰어넘어 제어되지 않은 채 날뛰는 감정이 '화'라는 것이다.

 

또한 로마 시대의 잔인함은 화가 아니라 야수성이라고 말한다. 야수성은, 당한 만큼 갚아주기 위해 상대를 해친다는 의미의 '화'와는 또 다른 것이다. 야수성은 복수가 아닌 쾌락을 위해 남을 죽이고 괴롭히는 것이다. 로마 시대 검투사나 지하 감옥에서 사자에게 죽임을 당하는 사람들, 유리잔 하나 깼다고 물고기밥 신세로 전락되어야 하는 노비 등의 모습에서 야수성이 드러난다.

 

현재로서는 믿기지 않는 이런 잔혹한 야수성도 처음에는 '화'로 시작되었으나 이렇듯 변해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제어되지 않는 '화'란 고삐 풀린 말이 되어 불구덩이 속으로 우리를 내동댕이 치고도 남을 어리석고 격한 감정이다. 그 불구덩이에서 우리가 타들어가기 전에 감정의 고삐를 틀어쥐어야 하지 않을까? 

 

"조심하시오. 당신의 화가 적들에게 기쁨이 되지 않도록." 241쪽

 

화가 치밀어 올라 화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때에 이 말을 되새겨 보아야겠다. 내 몸과 내 마음이 '내 것'이라면 마땅히 내 뜻대로 움직여져야 함에도 너무 무기력한 날, 너무 슬프고 고통스러운 날, 너무 억울하고 회한에 찬 날, 너무 귀찮고 버겁기만 한 날...우리는 우리 안의 감정의 끈 조절에 실패해 버리고 만다. 완전히 끊어져 버리기 전에 우리의 감정을 먼저 돌보고 어루만져 주는 시간들이 필요하다. 여유가 생길때 이성도 돌아오고, 나를 지켜내고 내 가족을 지켜낼 의지도 돌아오는 법이다. 

 

짧은 인생을 화내는 것에 낭비하지 말라고 조언하는 세네카는 '죽음이 너희를 모두 똑같게 만들리니!'를 외친다. 어차피 죽을 인생 화내다 살아야지, 생긴대로 살아야지 하며  그렇게 인생 낭비하지 말자는 것이다. 죽음만큼 공평한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다 죽는 덧 없는 생명 앞에 '화'내는 어리석음을 멈추어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너는 자신이 화를 내는 상대에게 죽음 이상의 것을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네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그는 죽을 것이다. 어차피 그렇게 될 일을 일부러 야기하려 애쓴다면 그것은 헛된 노력이다. 2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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