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오늘의 생각

내 안의 불안과 화해하기

언니가 어느 날 내게 물었다.
"날마다 택시를 타는 게 정상이니?"
"바쁘니까 타겠지."
"바쁜 일 없는데도 탄대."
"돈이 많은가 보네."
"별로 없는데도 그래. 버스나 전철을 못타고 택시만 타야 된대."
"!!!"
누군가의 이야기를 대충 손쉽게 넘겨 들으려고 한 나의 마음 자세가 민망스러워졌다. 자세히 물어 보았다.

 

언니 지인의 아들 이야기였다. 그 친구는 훌쩍 자란 청년인데 어릴 때 불안증세를 보이더니 고등학교때 정점을 찍었고 그 이후 대학을 가서도 해결되지 않아 힘들어하고 있었다. 수업을 하도 자주 빠지니까 결국 휴학을 해야하나 고민중인 상태라는 거다. 부모들은 자식에게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의 이런 모습을 지켜봐야하니 서로가 고통의 세월을 간신히 버티고 있을 뿐이다. 

 

이 청년이 어렸을 적에 태권도 학원을 다녔는데 그 곳 사범이 욕심이 많고 무서운 사람이었다고 한다. 소심하고 겁이 많은 그 집 아들을 좀 강하게 키우고 싶었던 부모들은 사범의 그런 성정이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정작 태권도를 배우는 사람은 부모들이 아니라 유약한 아들이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날마다 혼나고 지적을 받고 다니던 아들은 씩씩해지키는 커녕 갈수록 겁을 먹었는데... 속엣말을 하지 않은 탓에 그 학원을 꽤 오래 다닌 모양이었다.

 

그 후 중학교를 지나 고등학교에 가자 그 동안 억눌렸던 게 터져 나왔다. 성적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 강박처럼 다가오자 어릴 때의 그 혼란과 섞여서 학교를 더 이상 다닐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자퇴를 하고 2년 넘게 집에서 칩거하다가 수능을 보고 대학을 갔다고 한다. 그런데 성인이 된 지금도 생활의 불편을 느끼며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고통을 겪는다. 버스와 전철등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많은 교통시설조차 이용하지 못할 정도로....

 

두려움의 대상이 분명할 경우에는 공포를 느끼고 두려움의 대상이 모호할 땐 불안을 느끼게 된다고 한다. 청년의 어린 시절 공포의 대상은 태권도 사범이었다. 그 후, 새롭게 겪게 되는 상황마다 그런 공포를 자아낼 사람이 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며 고통스럽게 지낸다. 원치 않았겠지만 스스로가 불안을 계속 키워간 것이다.


이런 안타까운 이야기는 생각보다 우리 주변에 많다. 내 의지로 극복 가능한 일이 있는 반면, 의지와는 상관없이 불쑥불쑥 찾아와 내 일상을 뒤흔드는 일이 있다. 살다보면 그런때를 종종 만나게 된다.

 

내가 경계하는 부류의 사람이 있는데... 욕심이 많으면서도 무서운 사람이다. 의욕이 앞서지만 너그럽지 않은 사람을 나는 몹시 꺼린다. 그런 사람과 어떤 식으로든 인간관계가 맺어지면 그 끝은.... 파국이라는 걸. 나의 경우에서도 주변의 경우에서도 너무 많이 보아왔다. 특히나 그런 부류의 사람이 사범이나 교사, 교수를 하면서 학생을 가르칠 경우, 성향이 전혀 다른 학생은 진정한 지옥을 맞보아야 한다.

 

욕심많고 인정많은 사람은 주위의 사람들을 격려하고 함께 좋은 방향으로 이끌고 나간다. 욕심없고 무섭기만 한 사람은 주위에 사람을 모을 수조차 없다. 그런데 욕심많고 무서운 사람은 사람을 잘 모은 후 그 사람들을 자신의 통제권에 안에 두고, 자기 뜻대로 모든 것을 조정해 가려고 한다. "다 너를 위해서 그러는 거야."라는 자기변명을 늘어 놓으며. 만약 자신의 명령을 듣지 않는 사람이 보일 때는 가차없이 열외시켜 소외감과 고립감, 자기부정의 감정을 심어준다. 욕심많고 무서운 사람들은 자신을 망치는 게 아니라, 타인을 망치기 때문에 그 심각성이 크다.

 

블랙독 증후군은 유기견 입양시 검정색 개는 꺼려한다는 데에서부터 나왔다. 그런 부정적 인식이 확산되어 블랙독은 '우울증'을 나타내는 단어로도 쓰인다. 청년 안에 우울증을 심어준 그 옛날의 사범이 커다란 검은 사냥개처럼 여겨진다. 얘기만 전해 들은 나에게도 부정적 감정이 순간적으로 생기는데 긴 시간을 공포와 맞닥뜨렸어야 할 청년의 어린시절 고통은 상상이상이었을 것이다. 

 

갓 20대 들어선 청년이 택시를 불러서 타야만 외출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듣기만 해도 너무 속상하다. 우리는 얼마나 많이, 누군가에게 상처인 줄도 모른채 함부로 말하고 행동하고 자신의 잣대로 평가를 내리는 위험천만한 일들을 하는가....

 

어린 시절의 해소되지 않은 상처는 어른이 되었다고 해서 저절로 낫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자꾸만 '그림자아이'라고 칭해지는 마음속 병적인 불안이 시도때도 없이 고개를 내미는 것이다. 해결되지 못한 지난 상처에서 흐르는 진물과 누구도 이해해 주지 못한다는 외로움을 먹고 '그림자아이'는 날마다 조금씩 자라나 현재의 우리를 잠식해 버릴 수도 있다.

 

내가 청년의 엄마라면 어떨까. 우선 택시 타겠다고 할때마다 한숨 쉬는 걸 멈추고, 어떤 날은 택시도 같이 타주며, 세상 모든 놈들이 널 우습게 보더라도 괜찮다고, 나는 네가 최고라고, 공포도 불안도 실체가 없는 거라고, 욕심많고 무서운 놈들은 진작에 상종도 말자고, 그래도 우리는 재미나고 즐거울 수 있다고..... 생각해낼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짜내어 청년의 곁을 지켜주지 않을까. 지키다가 내가 힘들어 나가 떨어져 버리는 순간, 그때 불쑥 청년 홀로 일어설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인간은 나약하다 하지만, 때론 예측할 수 없을 정도의 강인함을 보여주는 존재이기도 하니까...

 

정신과 의사 유범희가 쓴 그림책 '그림자아이가 울고있다'는 우리 안의 불안과 우리 자신이 화해하는 과정을 담담히 그려내고 있다. 긍정적으로 산다는 것은 날마다 신나고 기분 좋게 산다는 것 뿐만 아니라, '긍정적으로 생각한다'처럼 '받아들인다'는 의미도 있다고 한다.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 그것 역시 긍정적인 것이다. 우리가 긍정적으로 살지 못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누구 보란 듯 잘 살 필요 없이 그냥 우리는, 우리 자신이 기분 좋게 살면 된다. 토닥토닥..... 우리는 충분히 위로받을만한 존재다.

애썼다. 장하다. 잘하고 있는 중이다.

지금 이 순간 만족이다. 

 

 

그림자아이는 과거의 어떤 기억과 연관된 부정적 감정이 현재의 비슷한 상황과 만나면 더 증폭되어 나타나곤 한다.
가령 생각과 행동에 왜곡을 일으키기도 하는데, 그 결과 실제 상황을 부정확하게 인식하면서 불안을 과도하게 느끼게 된다. 68쪽

 

무엇보다 그림자아이는 관심과 사랑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진다는 것을 꼭 기억하자. 76쪽

 

 

 

 

내 안의 그림자를 만난다는 것은 나의 가장 소중한 일부와 만난다는 것이다. - 칼 융

'오늘의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곰비임비&시난고난  (2) 2019.07.06
화내며 살기엔 짧은 인생  (4) 2019.07.05
당신이 자꾸 아픈 진짜 이유  (4) 2019.07.03
식사가 잘못됐다고요?  (4) 2019.07.02
걷다가 싸우다가 다시 걷기  (4) 2019.06.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