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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시간관리 프로젝트 30일

내 아이를 위한 칼비테 교육법

 

 

작가 이지성이 칼비테의 인문학 자녀 교육에 대해 쓴 '내 아이를 위한 칼비테 교육법'. 세계적인 교육학자들이 칼비테에 열광하는 이유는 칼비테가 자신의 평범한 아이를 비범하게 키워낸 특별한 교육 덕분이다. 칼비테는 부모가 아이를 위해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면 아이는 자신이 타고난 재능을 마음껏 펼친다고 믿었다. 아이의 가능성을 전적으로 믿고 잠재력을 끌어올려 준 덕분에 칼비테의 아들은 행복한 천재로 거듭날 수 있었다. 천재로 자란 아이가 궁금해서 이 책을 펼친 것은 아니다. 사회가 제공하지 못하는 교육을 부모가 대신해서 자녀에게 줄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읽었다. 

 

교육은 백년대계라고 한다. 십년수목십년수인이라는 말도 있다. 나무는 10년을 내다보고 심지만 사람은 100년을 내다보고 키워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말들이 무색하게 우리나라의 교육제도는 미봉책으로 수년에 한번씩 이리저리 뜯어고치기 일쑤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이유는 앞을 내다보는 긴 안목, 세월을 견디고 관통하는 교육에 대한 확신이나 신념이 부재하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학부모 중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 교육을 불신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제대로 된 교육이 이루어질 날은 저 멀리 어딘가에 숨어있는 듯 하다. 

 

세계최고의 교육으로 유명해진 핀란드도 원래는 문제가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35년에 걸친 장기 계획으로 문제점들을 하나하나 시정해 나가서 오늘날의 행복한 학교에 이르게 된 것이다.  핀란드의 교육은 잘하는 소수의 학생에게 관심을 쏟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학생을 격려하는 시스템이라고 한다. 아이 개개인을 소중히 여기고 단 한명도 낙오시켜서는 안된다는 국가적 방침에 따라 교육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물론 핀란드가 학력을 우선시하는 사회가 아니라는 점이 교육 개혁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하다.  

 

그에 비해 우리나라의 교육은 국민을 지배자에게 무조건 복종하게 만드는 프로이센의 교육을 모방한 일본의 교육을 그대로 수입해서 1910년 일제 강점기 이래 지속하고 있다.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바뀌지 않는 교육. 이 답답한 교육체계가 바뀌기를 원치 않는 누군가의 음모가 있는 것은 아닐까. 상상해 보게 된다. 현실의 부조리한 교육에서도 나름의 자구책으로 학력과 스펙을 움켜쥐는 일부의 사람들. 그들만의 리그. 그들만의 세상에 돌 한두 개씩 던져 파문을 일으키는 일. 그게 바로 우리 평범한 부모들이 해야할 일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200년 전 독일의 한 시골 마을에 살던 목사, 칼 비테는 아들의 교육에 모든 정성을 쏟았는데 학교에 대해서는 상당히 비판적 시선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칼 비테는 '학교는 지식을 파는 소매점으로서 강압적인 교육과정을 따르는 학생들을 대량으로 생산한다'고 했습니다. 평범한 학생들은 무능력한 양 떼에 불과하며, 사회가 만들어놓은 기득권의 틀에서 수탈당하는 바보로 살아가게 된다고 했습니다. 또한 부모가 지출한 비용에 비해 비효율적인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30쪽

 

칼 비테는 아들이 어릴때부터 다양한 인문고전을 읽히며 진리를 탐구하도록 가르쳤다. 아이가 궁금해하면 시골마을에 살면서도 지중해로 곧장 여행을 감행하는 결정을 내렸고 각 분야의 학문들을 다 접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산책하면서 끊임없이 대화를 유도했고 약속을 어길때는 가차없었으며 칭찬에 중독되어 교만해지는 것을 경계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당당하라 가르쳤고 평정심과 분별력으로 상황을 판단해 내도록 했다. 

 

그의 대단하고도 헌신적인 교육 방법을 보면서 그대로 똑같이 다 따라하자는 소리는 아니다. 우리의 현실에 맞게, 또 각 가정의 상황에 맞게 부모와 아이가 조율하여 교육을 해나갈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부모와 아이 스스로가 행복한 감정을 느끼는 것이다.

 

칼 비테가 말하는 행복은 스토아학파의 행복과 결을 같이 하는데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도 최선을 다하는 것을 말한다. 성공했거나 실패했거나 병들거나 건강하거나 어려운 환경에서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 그러한 마음의 상태를 행복이라고 이야기 한다. 어느 누구의 시선에도 꿋꿋하게 자신의 삶의 철학을 세우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사실 이 정도로 마음 흔들림이 없다면 그건 이미 교육 받는 수준을 뛰어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수많은 교육을 받고 책을 읽어도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행복'의 조건을 찾아 부나비처럼 이리저리 옮겨다니지 않는가. 무엇이 중요한지 본질을 모른채 말이다.

물질적 행복, 세속적 행복을 뛰어넘는 정신적 행복에 이르는 길. 그것이 바로 인문학에서 이야기하는 행복이고 칼 비테 자녀교육의 기본이다.  

 

칼 비테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나날이 새로워지도록 노력하여 평생 완벽을 추구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완벽을 추구하는 자체가 행복이라 여기며, 이르기 힘들더라도 이루고자 애쓰는 삶에 가치를 두었다. 실패하고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 도전하는 삶. 어떤 좌절에도 굴복하지 않는 삶을 살기를 소망했다.

 

실패에서 멈추면 실패한 사람으로 남지만 다시 시도하여 성공하면 결국엔 성공한 사람으로 남게 됩니다. 이렇게 잘못을 고치는 과정에서 아이는 자신감과 독립 정신도 키우게 됩니다. 그래서 칼 비테는 어떤 일에든 아이가 실패하더라도 용기를 잃지 않고 좌절감에 빠지지 않게 했습니다. 용기를 잃지 않는 법과 좌절하지 않는 법을 가르쳐야 진짜 자주적이고 당당한 아이로 자란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177쪽

 

칼 비테는 자신의 아이를 수많은 인문 고전으로 키웠지만 공부만 하느라 지혜를 얻지 못한다면 차라리 배우지 않는 편이 낫다고 주장한다. 과도한 지식은 지혜롭지 못한 사람에게 독이 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세상에는 수많은 교육법이 있고, 더 많은 책들이 있다. 그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일 수 없으므로 각자에게 맞는 교육법과 교육에 대한 나름의 철학을 세우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부모와 자녀 사이의 믿음을 바탕으로 한 행복이다. 행복한 가정은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의 이유로 불행하다는 톨스토이의 유명한 말처럼. 행복 하나 믿고 그냥 행복하려고 애쓰면 행복해지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최소한 우리들 가정의 불행이 '아이의 교육' 때문은 아니기를 바라지만....이 바람이 헛된 것이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안다. 아이의 교육이 걱정되고 그로 인해 가족의 행복이 위기에 처해있다면 자신들만의 교육법을 점검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불행해지려고 세상에 온 것이 아니다. 불행지려고 교육을 받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행복하지 않고 자꾸만 불행한 쪽으로 우리의 몸이 기울어지고 있다면. 일단 멈춤하고

여유를 가지며 세상을 둘러보자.

 

세상으로 향하는 수만 갈래의 길이 있는데도 한가지 길에만 집착하며 행복하지 않다고 울부짓는 건. 불행해지려고 작정한 것과 다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