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독서 시간관리 프로젝트 30일

하루키 -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3

137~187P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세번째 시간. 

이 책은 달리기를 축으로 한 하루키의 문학과 인생에 대한 회고록이라고 불린다. 특히 이 부분에서 하루키는 신체에 대한 한계를 끊임없이 생각하고, 덧없는 인생이지만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준다. 이야기를 따라가며 그의 호흡을 같이 느끼는 순간, 경건해지는 나를 발견한다. 

 

어느날 하루키는 보스턴의 찰스강을 달리면서 자신을 앞지르는 하버드의 신입 여대생들을 보게 된다. 금발의 포니테일(머리를 올려묶어 말꼬리처럼 늘어뜨린 형태)을 한 당당한 하버드 여대생들은 추월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고, 추월 당하는 것에는 길들여져 있지 않을 것이라 추측한다.

하긴 자신감있고 당당한 젊음은, 스스로가 무엇이든지 할 수 있고 늘 승리할 것임을 예단케 하는 법이니까. 그들은 지는 법을 알지 못한다.

 

그에 비하면 나는, 내 자랑을 하는 건 아니지만, 지는 일에 길들여져 있다. 세상에는 내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산만큼 있고, 아무리 해도 이길 수 없는 상대가 산더미처럼 있다. 그러나 아마도 그녀들은 아직 그런 아픔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당연한 일이지만 그런 것을 지금부터 굳이 알 필요도 없을 것이다. (중략)  

나의 인생에도 그런 빛나는 날들이 존재했었을까? 그렇다, 조금은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 그때 내가 긴 포니테일을 갖고 있었다 해도 그것은 그녀들의 포니테일만큼 자랑스럽게 흔들리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145쪽

 

나이들면서 세상 일이 우리가 뜻한 바 대로 모두 다 이뤄지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세계적인 문학가인 하루키조차도 '지는 일에 길들여지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인생이다. 그가 쓴 이런 문장을 보면 계속 생각하게 된다.  하루키가 자꾸만 스스로를 길 위에 내놓는 것은 아마도 '지는 법'을 배우기 위함이 아닐까 하고. 세계적 명성을 얻은 성공한 문학가의 삶에 도취되지 않도록 육체를 극한으로 몰고 가서 삶의 균형을 맞추려는 것은 아닐지 생각해 본다.

장거리 달리기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1등만 하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 누구나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게 된다. 긴 인생에서 한 번의 승자가 최후의 승자가 된다는 불변의 법칙같은 게 통할리 없잖은가.  그에게는 없다는 포니테일이지만, 우리는 누구나 안다. 그의 문학적 포니테일이 얼마나 자랑스럽게 세계 곳곳에서 흔들렸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끊임없이 경계하고 다듬고 낮춰나가는 모습을 본다. 그의 이런 인간적이고 소박한 면모가 그의 문학을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나는 되도록 그와 같은 위축 현상을 피하고 싶다. 내가 생각하는 문학이라는 것은 훨씬 자발적이고 구심적인 것이다. 거기에는 자연스럽고 긍정적인 활력이 있어야 한다. 나에게 있어 소설을 쓰는 것은 험준한 산의 암벽을 기어오르고, 길고 격렬한 격투 끝에 정상에 오르는 작업이다.자신에게 이기든지, 아니면 지든지 둘 중 하나일 수 밖에 없다. 그 같은 내적인 이미지를 염두에 두고, 나는 언제나 장편소설을 쓰고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언젠가 사람은 패배한다. 육체는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 쇠잔해간다. 빠르건 늦건 패퇴하고 소멸한다. 육체가 시들면 정신도 갈 곳을 잃고 만다. 그와 같은 것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지점을 -결국 내 활력이 독소에 패배해서 뒤처지고 마는 지점을- 조금이라도 뒤로 미룰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것이 소설가로서 내가 목표하고 있는 것이다. 우선 지금의 나에게는 '쇠퇴해 있을' 겨를이 없다. 그러니만큼 "저런 자는 예술가가 아니다"라고 누가 말한다 해도 나는 계속 달린다.   152쪽

 

하루키는 늘 장거리를 달리느라 강가 주변, 도로 위에서 동물들의 사체를 무수히 목격하곤 한다. 깊이 잠든 것 같은 동물들의 표정은 '조용히 생명의 끝을 받아들이고 뭔가로부터 해방된 것처럼' 보였다고 표현한다. 운명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동물들을 보면서 내달리는 하루키의 심정을 가만히 느껴본다.

우리는 결국 죽을 것을 알지만, 죽음이 코 앞에 매달리기 전까지는 각자의 인생을 내달리게 되어 있다. 누구라도 그렇다.

모든 것이 쇠락해지고 말겠지만 그전까지는 결코 쇠퇴해 있지 않겠다는, 그래서 끝내 달리고야 말겠다는 그의 결의가 빛난다. 한결같이 달리는 그를 보며, 생을 불살라 생을 이어나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라톤 코스 42.195 킬로를 넘어 울트라 마라톤 100 킬로미터에 도전한 하루키는 75킬로 지점에서의 고통을 이렇게 표현한다. '느슨하게 돌아가는 육류 다지는 기계 속을 빠져 넘어가는 쇠고기와 같은 기분이었다..... 몸이 뿔뿔이 흩어져 당장이라도 해체되어 버릴 것 같다.'

그때마다 그는 스스로 이렇게 타이른다.

'나는 인간이 아니다. 하나의 순수한 기계다. 기계니까 아무것도 느낄 필요가 없다.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그러면서 자신이 감지해 낼 수 있는 세계를 극도로 좁힌다. 바로 코앞의 가까운 세계만을 인식하고 다른 모든 생각을 멈추고 무조건 달려나간다. 묵묵한 기계처럼 그렇게 거대한 고통을 뚫고 전진한다.

다른 많은 주자들이 달리고 걷기를 반복하며 다리를 쉬게 할 때도 그는 절대 걷지 않는다. 걷기 위해 참가한 레이스가 아니라 달리기 위해 참가한 레이스이므로. 자신이 정한 규칙은 단 한 번도 깨트리지 않는다. 한 번 깨면 또 다시 깰 수 있는 게 규칙이라는 걸 아는 하루키에게 예외란 없다. 무서울 정도로 냉정하게 자신을 극한의 세계로 몰고가 결국 100킬로미터를 11시간 42분만에 완주해낸다.

 

고통이 너무 크면 주변을 두리번거리지 않게 된다. 주변 어떤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으며, 눈에 들어올 만한 가치 있는 것조차 떠오르지 않는다. 고통은 그렇게 오로지 자신에게만 집중하게 하는 수단이 될 때도 있다.

고통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그 고통속에서 날 것 그대로의 자신을 마주하고 스스로가 하염없이 작은 존재라는 것을 인정할 때이다. 그래야 무엇이든 새로 시작할 수 있게 된다. 외면한 고통은 언제까지고 우리를 따라다닌다. 해결해 달라고, 마무리지어 달라고.. 연극 무대에서도 한 막이 끝나야 다음 막이 시작되는 것처럼, 한 단락 고통스런 순간이 끝나야 새로운 순간이 열린다. 그래서 인생을 하나의 긴 줄로 보면 중간중간 울퉁불퉁한 매듭이 있게 된다. 그 매듭이 우리들 상처가 아문 자리이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