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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시간관리 프로젝트 30일

하루키 -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2

78~133p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두 번째 시간

달리기를 해 본 적이 언제이던가. 마트에 물건을 두고 와서 되돌아 갈 때라든지, 자리를 맡으러 서두를 때 조차도 걸음을 조금 빨리 했을 뿐 달리지는 않았다. 이 나이쯤 되면 의도적으로 '달리기'라는 목표를 계획하지 않는 이상 생활 속에서 달려야 할 일이 거의 없다.

그래서인지 책을 읽으며 하루키가 달리는 장면이 나오면 가슴이 뛴다. 숨이 가빠진다. 수십 킬로미터씩 달린다는 말이 실감나지 않지만 듣는 것만으로도 버겁다. 책의 마지막까지 계속 달리는 그를 보다가는 실신할지도 모르겠다. 50페이지씩 끊어 읽느라 그나마 내 상태가 온전한 거다. 

하루키는 1983년 그리스 아테네에서 마라톤까지의 42킬로미터 구간 완주를 홀로 힘겹게 해낸다. 잡지사로부터 그리스 여행기사 청탁이 들어오자 홀로 마라톤 코스를 달리는 이야기를 써보겠다고 응수한 덕택이다. 낮잠 자는 시간(시에스타)이 따로 있을 정도의 불볕더위 탓에 걷는 사람조차 드문 그리스에서의 '달리기 선언'은 언뜻 '미친 사람의 허언'처럼 보인다.

하지만 달리고, 쓰는 데 있어서 만큼은 예외라는 것이 없는 하루키는 새벽부터 혼자 묵묵히 달리기 시작하고 결국 완주한다. 그게 그의 비공식적 첫 풀코스 달리기인 것이다.

그후 수십 년째 풀 마라톤 코스를 달리는 그가 느끼는 감정은 항상 첫 완주 때의 그것과 같다. 30킬로까지는 '이번에는 좋은 기록이 나올 것'이라 기대하지만, 35킬로부터는 에너지가 떨어지면서 끝도 없는 화가 치밀어 오른다. 풀 뜯는 양들에게까지 화가 날 지경이다.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텅 빈 가솔린 탱크를 안고 계속 달리는 자동차 같은 기분'이 든다. 멘붕상태를 겪으면 비로소 완주가 끝난다.

그런데 완주 후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하루키는 달릴 당시의 고통을 까맣게 잊고 '다음에는 더 잘 달려야지' 하고 다짐해 버린다.   

 

어떤 종류의 프로세스는 아무리 애를 써도 변경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프로세스와 어느 모로나 공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가정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집요한 반복에 의해 자신을 변형시키고 (혹은 일그러뜨려서), 그 프로세스를 자신의 인격의 일부로서 수용할 수밖에 없다. 아, 힘들다.   107쪽 

 

하루키가 마라톤의 구간 마다에서 느끼는 감정의 높낮이가 다른 것처럼 삶의 곳곳에 포진해 있는, 우리를 둘러싼 고난과 시련의 요소들도 제각각이다. 견디려고 애써봐도 늘 고통이 따르지만, 그것들을 극복해내려는 자신만의 행로는 분명히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그저 그 길을 따라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 마침내 그 걸음 자체가 자신의 삶이 될 때가 있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고난은 고난이 아닌 거다. 힘들다고 푸념하면서도 늘 뛰어넘고 극복하게 되는 고난은 나를 단련시켜 나가는 과정에서의 도구이고 수단일 뿐이다.

핵심은 고난에 있지 않다. 고난을 거쳐나가는 과정에 있다. 그 과정을 피하지 않고 마주하고 응시하는데에 있다. 그런 과정을 인격의 일부라고까지 표현하는 하루키를 보니 매사 나의 선택 하나하나도 허투루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나는 더 이상 젊지 않다. 지불해야 할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그에 상응하는 것밖에는 손에 넣을 수 없는 나이에 접어들고 있는 것이다.   (중략)  

인생이라는 고속도로에서 추월차선만을 계속해서 달려갈 수는 없다. 그러나 그와는 별개로 똑같은 실패를 몇 번이나 되풀이하고 싶지는 않다. 하나의 실패에서 뭔가를 배워서 다음 기회에 그 교훈을 살리고 싶다. 적어도 그러한 생활 방식을 계속하는 것이 능력적으로 허용되는 동안은 그렇게 하고 싶다. 88쪽  

 

살면서 늘상 좋은 일, 잘되는 일만 있을 수 있겠는가. 넘어지고 엎어지면서도 다시 일어서고, 주저앉아 있다가도 정신 차리려는 시도는 더 이상의 실패를 반복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잘 될 거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는 것은 자기 생에 대한 애착 때문이다. 애착이 있는 한 대가를 치르겠다는 마음도 있을 거라 생각한다.

등가 교환의 법칙을 믿는다면 오늘 내가 하는 작은 일 하나하나에 의미부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더 열심히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작은 일들이 쌓여 가서 내가 원하는 일의 형태로 바뀐다는 것을 의심치 않을 것이다. 결국 내 시간을 녹여 내 안에 들이 부어야 차고 넘치는 어떤 순간이 온다. 보이지 않는 막막한 그 순간을 향해 그저 오늘도 나는 나를 녹여낸다. 

 

하지만 내 생각이지만 오래 살고 싶어서 달리고 있는 사람은 실제로는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설령 오래 살지 않아도 좋으니 적어도 살아 있는 동안은 온전한 인생을 보내고 싶다'라는 생각으로 달리고 있는 사람이 수적으로 훨씬 많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든다...(중략).....

주어진 개개인의 한계 속에서 조금이라도 효과적으로 자기를 연소시켜 가는 일, 그것이 달리기의 본질이며, 그것은 또 사는 것의(그리고 나에게 있어서는 글 쓰는 것의) 메타포이기도 한 것이다. 이와 같은 의견에는 아마도 많은 러너가 찬성해줄 것으로 믿는다. 128쪽

 

하루키에게 달리기는 일종의 경건한 의식이다. 엄청난 정신적, 육체적 노동을 감당해야만 하는 소설가로서의 삶을 평생 동안 유지하기를 갈구하는 그가 글쓰기와 짝을 이루도록 나란히 선택한 것은 달리기다. 그에게 달리기는 글쓰기이고, 사는 것 자체일 것이란 생각이 든다.

육체와 정신을 끊임없이 다듬어 나가며 키우는 일, 스스로를 효과적으로 연소시켜 이루어 내려는 일이라면... 기왕지사 자신이 가장 하고 싶고 좋아하고 가치 있는 일을 선택하자. 내가 하는 그 모든 일에 '나의 품'이 든다면 제대로 쓰이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예민하게 촉각을 곤두세우고 찾아보련다. 달리고 쓰기를 평생의 업으로 삼는 하루키처럼, 나도 내 평생을 걸 무엇을 찾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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