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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생각

장미, 너 참 예쁘다

길을 가다가 장미가 너무 예뻐서 걸음을 멈췄다. 꽃이 보기 좋아 가던 길을 조금 미루게 되는 날이 있다. 젊었을 때 보다 그 횟수가 더 빈번해진다. 멈추고 쉬면서 돌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 나이가 든다는 것은 축복이다. 이 예쁜 꽃을 보고도 내 앞을 걸어가던 젊은 여성은 그냥 지나쳤다. 나는 휴대폰으로 꽃들의 모습을 담아냈다. 누구의 삶이 더 풍요로울지 따져 보자는 건 아니다.

다만 젊을때는 꽃보다 더 싱그러운 자신의 젊음으로 주변이 잘 보이지 않을 수 있다. 내 젊은 날 기억을 헤집어봐도 꽃을 중심으로 행복했던 순간은 잘 떠오르지 않는다. 그때는 꽃보다는 사람에 치중하였다. 꽃보다 더 아름다운 사람에 취한 시절이었다. 

 

 

장미도 본 김에 도서관에서 책을 읽으면 술술 잘 읽히겠다 싶어 발길을 돌리는데 까르르 웃는 소리가 들린다. 공원으로 유치원 아이들이 소풍을 나온 거다. 평일 낮의 공원에는, 얼굴을 온통 희고 검은 마스크로 중무장한 채 경보 수준으로 걸어가는 사람들만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꼬물꼬물 귀여운 아이들이다. 아이들 구경을 멈추고 도서관에서 책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종이책만 책이더냐? 사람책도 책이다.  한 사람 한 사람. 각자의 사연과 의미없는 경우를 보지 못했다. 모든 사람에게는 그들만의 이야기가 있다. 펼치는 순간 쏟아져 내리는 각자의 보석같은 이야기들. 그 중에서 유아책들을 운좋게 만난 셈이다. 

 

 

 

길을 가로질러 건널 줄도 알고 나란히 줄맞춰 선생님앞에 서 있을 줄도 아는 아이들의 모습이 신기하고 예쁘다. 딸아이의 어린 시절이 떠올라서인지 아이들 모습 하나하나가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돗자리 위에 앙증맞게 세워 놓은 아이들 가방을 보며 웃음이 났다. 붙어있는 가방들처럼, 얘들아 사이좋게 지내렴~~ 그런데 혼자 떨어져 있는 가방은 왜 저러고 있는 거니? 낮잠 자고 있다고 생각하려고 해도 엎드려 있는 모습이 꼭 우는 것만 같다. 설마, 싸운 건 아니지? 싸우고 속상할 때도 있겠지만, 서로 토닥토닥해주렴. 마음에 드는 친구 사귀기가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애써볼만한 가치는 있단다. 
 

 

정말로 아이들 구경만 하려고 했는데, 공원 곳곳에 장미가 만개해 있을 줄이야... 가는 곳마다 장미 천지에 사진 찍는 사람들도 많다. 조금 심하게 과장하면 에버랜드 장미축제에 온 것 같은 느낌? 서둘러 사진을 찍은 탓에 실제 장미보다 한참 아쉽게 표현됐다. 실물이 훨씬 예쁜 장미들이었는데. 미안. 아줌마가 손이 좀 많이 떨려....

 

 

이왕지사 아이들도 보고 장미도 실컷 본 김에 아예 공원 한바퀴를 돌기로 마음 먹는다. 유모차가 있어서 봤더니 젊은 엄마가 어린 딸아이와 갓난쟁이를 데리고 공원에 소풍을 나온 모양이었다. 평상 위에 돗자리를 야무지게 깔고 갓난쟁이는 눕혀 놓은채 딸아이에게 싸온 도시락을 풀어 주고 있었다.

그때 딸아이가 이렇게 묻는다. "엄마, 김치 없어요?" 젊은 엄마가 "어, 미안. 김치 까먹었어."  그런다. 모녀가 너무 귀여워서  멀찌감치에서 배경에 조금 걸리게 사진 한장을 찍었다. 최대한 얼굴이 나오지 않게 실루엣만 찍었다. 그들도 기억하고 싶었고, 그들이 행복한 순간 곁을 스쳐지나갔던 나도 기억하고 싶어서였다. 

 

 

예쁜 모녀 뒤로 펼쳐지는 잔디와 보라색, 아이보리색 꽃들이 예쁘다. 이름모를 꽃들을 그냥 즐기기로 한다. 그들의 이름을 모른다하여 그들의 아름다움까지 모르는 것은 아니니까.

나는 너희들 있는 모습 그대로에 감탄할 준비가 된 사람이란다. 

 

 

중년여성 여러명도 공원을 걷는다. 혼자 걸으면 깊은 생각을 할 수 있고, 함께 걸으면 유쾌하고 재미있다. 공원을 걷는 건 그래서일거다. 

쇼핑도 하고 비싼 음식점도 가보는 중년의 한 때도 필요하고, 이렇듯 한낮의 여유를 이야기로 풀어내며 걷는 중년의 한 때도 필요해 보인다. 나는 이제서야 비로소 '누구의 삶이 더 낫네. 덜 하네'라며 규정짓지 않고, 저울질하지 않는 마음을 갖게 되나 보다. 나 스스로가 삶의 균형감각을 찾아 가는 중인 것 같다. 

 

 

장미는 아까 본 게 다겠지 했는데 공원 한편으로 또 있다. 장미와 꽃들 천지다. 항상 내가 보는 현상의 이면에는 무언가가 또 있을 수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그걸 무시하고 집에 갔으면 요런 귀여운 인형 설치물을 볼 수 있었겠나? 

 

 

그냥 가버렸으면 흔들 그네를 신나게 즐기는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볼 수 없었을 거다. 노인들이 그네 의자 싫어할 거란 편견은 버려야 한다. 그분들이 일어나시면 한번 타볼까 했는데 결코 물러서는 법이 없으셨다. 내가 물러섰다. 

 

 

할아버지 세 분이 한 벤치에 나란히 앉아서 사진 한장을 찍으신다. 인증샷이다. 꽃은 그렇게 아름다운 거다. 노년의 삶에도 반짝반짝 생기를 준다. 꽃을 배경으로 한 노년의 우정이 더 아름다워 보인다.

 

 

울타리 색깔이 하늘색을 중심으로 서로 다른 무채색들의 연결이라 눈길이 갔다. 빨강이나 노랑의 원색이었으면 앞에 핀 꽃들의 예쁨을 가렸을지도 모른다. 배경으로서의 역할을 우직하게 해내며 꽃들을 돋보이게 하는 높이가 제각각인 울타리를 바라본다. 각자의 개성이 뚜렷하지만 물러서고 나서야 할 때를 아는 현명한 울타리에게서 한 수 배운다. 

 

 

평일 한낮. 잠시 잠깐 둘러 본 공원에서 느낀 점이 많았다. 그 느낌을 조금 더 간직하고 싶어서 도서관에서의 책읽기는 생략했다. 책만큼 중요한 세상 읽기를 했으니 나는 충분히 만족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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