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투만큼 잔인한 스포츠가 있을까?
하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청소년 시절 TV에서 본 슬픈 권투는
어린 시절 봤던 재미난 권투랑 달랐다.
선수의 얼굴에서 흘러내리는 피에 대한 나의 느낌이
그 몇 년 사이에 전혀 다르게 변해 버린 것이었다.
사춘기가 되면서
세상을 보는 내 시선엔
슬픔과 삐딱함, 외로움이 가득차 있었다.
세상 모든 것이 불쌍해 보였던 때였다.
그래서
고기도, 생선도, 달걀도
먹지 못하던 때였다.
그때
본 권투.
사각의 링 위에 선 두명.
누구의 편을 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그 권투가 싫었다.
링 주변에서 구경하는 관중들이 싫었다.
시청하는 대중들이 싫었다.
그 두 선수의 영원할 것 같은 긴장의 시간을
구경하듯, 때론 조롱하듯
바라보는 그 수많은 눈빛들.
싫었다.
나는 그때 본능적으로...
권투가
인생과 닮았다는 걸 알아챘던 것 같다.
언제나 피할 수 없는 상황들이 생기기 마련이고
그때마다 자신이 가진 역량을 쏟아 부으며
상대방이라는 세상의 공격을 감당해내며
묵묵히 주먹을 날리는 것이..
그게 바로 인생이라는 것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무섭게 다가온
권투 경기가
내가 살아가야 할 인생과 별 다르지 않을 거라고.
꿘투 - 이장근
관장님께 권투는
권투가 아니라 꿘투다
20년 전과 바뀐 것 하나 없는 도장처럼
발음도 80년대 그대로다
가르침에도 변함이 없다
꿘투는 훅도 어퍼컷도 아니라
쨉이란다
관중의 함성을 한데 모으는 KO도
쨉 때문이란다
훅이나 어퍼컷을 맞고 쓰러진 것 같으나
그 전에 이미 무수한 쨉을 맞고
허물어진 상태다
쨉을 무시하고
큰 것 한 방만 노리면
큰 선수가 되지 못한다며
왼손을 쭉쭉 뻗는다
월세 내기에도 어려운 형편이지만
20년 넘게 아침마다 도장 문을 여는 것도
그가 생에 던지는 쨉이다
멋없고 시시하게 툭툭
생의 문을 두드리는 것이다
도장 벽을 삥 둘러싼 챔피언 사진들
그의 손을 거쳐 간 큰 선수들의 포즈도
하나같이 쨉 던지기에 좋은 자세다.
내가 권투를,
제대로 살아보지도 않은 인생을
두려워했던 이유를
살다보니 조금씩 깨닫게 된다.
권투에서 커다란 어퍼컷을 날리고
권투에서 상대방을 이기고
권투에서 끝끝내 승리의 노래 부르기만이...
권투의 모든 것인 줄 알았기에 두려웠던 것이다.
권투에서 진다고
권투가, 권투가 아닌것이 아니라는 걸.
링 위에 올라설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는 걸
알게되면서부터 권투가 덜 무서워졌다.
권투는 무수한 쨉이 모이는 경기,
그 쨉들이 모여서 결과를 내는 경기.
이기고 지고 승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쨉을 날릴 수 있는 배짱이 있는지
무수히 많은 쨉을 날릴 수 있는 성실함이 있는지가
권투의 전부인 것 같다.
인생과 닮았다.
오늘 우리 가족은 새롭게 쨉을 날리러 간다.
두려워하기 보다 도전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쨉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작은 몸짓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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