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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생각

글쓰기 책을 읽다가 울었다.

한때 글쓰기에 도움되는 책들을 읽곤 했다. 그램책, 동화책, 청소년책, 소설책 등등의 쓰기에 관한 방법들을 알려주는 책들과 글쓰는 사람의 자세에 관한 책들. 글감옥에 자신을 가두어가며 글을 쓰고, 수십만장의 원고지를 손글씨로 깨알같이 채우고, 단계별 소설 작법을 알기 쉽게 풀이해 주고....하는 책들. 그 모든 책들이 글을 쓰는 방법들을 알려주었다. 읽는 당시에는 내게 도움도 되고 기억에도 남았던 것 같다.

나중에는 중국 작가 유협이 고대에 쓴 문심조룡도 선생님들과 함께 읽고 공부했다. '문심(文心)'은 문학에 관련된 활동, 또는 언어가 매개인 예술 활동을 하는 인간의 정신과 감정, 영감을 말한다. '조룡(雕龍)'은 상징적 용어로서 용을 조각하듯 문학을 창작하는 데에는 세심한 주의와 인내가 요구된다는 뜻이다. 즉, 요즘 말로 쉽게 하면 '문심조룡'이란 정신 수양을 하면서 문학적 글을 쓰는데 도움이 되는 글쓰기 책이다.

마흔 넘어 나 스스로를 위한 공부, 나를 찾는 공부를 열심히 하며 살던 때가 있었다. 책장에는 그 시절의 나를 떠올리게 할 글쓰기 관련 책들이 여러권 꽂혀있다. 그렇게 공부하며 글만 쓰고 살 줄 알았던 시기도 있었는데... 그 후 글쓰기 책은 고사하고 어떤 책도 눈에 들어오지 않아서 덮어버리고 지냈다. 읽지 않으니 생각하지 않았고, 생각하지 않으니 쓸 수가 없었다. 아니 쓰고 싶은 마음 자체가 들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길고 긴 우울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한채 가라앉기만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나는 그럴 수록 더 읽어야 했고, 더 고민하고 생각하고 써야했다. 나를 괴롭게 하는 모든 상황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로지 '괴로운 상황'과 전혀 다른 '새로운 상황'속에서 의미있는 일을 하는 것이었는데, 나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채 자신을 방치했다.

<강원국의 글쓰기>를 읽었다. 글쓰기 책을 부러 피한 것은 아니지만 손에 잡히는 다른 책들을 먼저 읽었다. 마음 속에 '나는, 다시는 쓰고 싶지 않다, 쓸 일이 없을 것이다' 단정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직도 내 마음은 완전히 회복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글을 쓰기 위한 작가의 알토란 같은 노하우들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필기하며 되새기며 내 것으로 만들어도 모자랄 판에, 그가 알려주는 글쓰기 비법들은 내것이 될 수 없어 보였다. 멀게만 느껴졌다.

그런데...무심히 읽고 있던 한 부분에서 내 울음보가 터지고 말았다.

나는 공감 능력없이 50년을 살았다. 앞만 보고 달렸다. 손톱만한 열대어 구피가 굶어 죽을까봐 아내가 명절 때마다 어항을 싸들고 본가에 가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구피에게 밥 한번 줘 본 적도 없다.
그러던 내가 쉰 넘어 출판사 평사원으로 입사했다. 출근 첫날 자기소개를 하라고 했다. 사장 빼고 전원이 여성인 직원들 앞에 서서 살아온 과정과 포부를 얘기했다. 자기소개가 끝나자 가장 고참인 듯 한 분이 잠깐 보자고 했다. 나는 왠지 옥상으로 불려 나가는 심정으로 사무실 문을 열고 나갔다. 복도에 서 있던 그녀가 한마디 했다. "앞으로 그렇게 길게 말하지 마세요." 문을 쾅 닫고 들어갔다. 뒤따라 들어가니 직원들 눈빛이 하나같이 살벌했다.
나이 쉰이 넘어 이게 무슨 일인가. 아내와 아들이 이 장면을 보기나 한 것처럼 얼굴이 화끈거렸다. 갈증이 났다. 터덕터덕 계단을 내려와 사무실 1층에 있는 편의점에 들어서려는 순간, 50대 중반의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정장 차림의 그는 허공을 응시하며 보름달빵과 딸기우유를 꾸역꾸역 목구멍에 밀어 넣고 있었다. 오전 11시가 다 된 시각이었다. 그에게 보름달은 아침일까. 점심일까. 나는 눈물이 핑 돌았다. 그제야 사람이 보이기 시작했다. 123쪽

사람은 누구나 상처없을 수 없으며, 그 상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상처를 들여다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인간은 굉장히 자기 중심적 존재여서 다른 사람의 상처에 그냥 관심을 가지지는 않는다. 나의 상처에 빗대어 들여다 보게 되는 것이다. 나의 상처에 어룽지는 그의 상처만을 보게 될 뿐이다. 결국 내 상처가 있다는 전제하에 타인의 상처가 이해되는 것이다. 내 상처 위에 타인의 상처가 덧입혀지며 비로소 공감하게 된다. 나만큼 너도 힘들구나....

그러니 내 상처는 부끄러움이 아닌 거다. 내 상처는, 타인의 상처를 바라보고 맞장구 쳐줄 공감의 공통분모인 거다. 우리의 공감이 커질수록, 공통분모가 커질수록 상처를 견뎌내기가 수월해질 것이다. 엄청난 규모와 형태를 지닌 고통이 분자로 와도 괜찮을지 모른다. '공감'이라는 공통분모를 키워서 '고통'의 분자를 소수점으로, 제로로 나눠버리면 되니까. 그럴 수 있다. 공감은 그렇게 힘이 세서 다 쓰러져 가는 사람도 일으켜 세울 수 있다.

정장 차림 남자가 보름달 빵을 먹듯, 퇴사한 김보통 작가가 식빵을 먹다 곰팡이를 발견하듯, 그 곰팡이 앞에서 먹을까 말까 조금 갈등하다가도 다른 브라우니를 만들어 먹을 수 있듯..... 나는 나만의 빵을 목구멍으로 밀어 넣는다. 그리고 힘을 내서 일어서 보려 한다. 언제적 글쓰기였던지 기억도 가물가물하지만, 나를 위로 하고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다면 해 볼거다. 하긴 누군가를 위로 못하면 어떠한가. 일단 나를 위로하는 사람으로 바로 '나 자신'을 선택했다는 점이.... 이 얼마나 당차고 다부진 행보란 말인가. 알고 보면 볼수록, 두고 보면 볼수록...나를 믿을 건 믿음직한 '나' 밖에 없다.

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