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멀 라이프를 위한 첫발을 떼보겠다고 책정리를 조금씩 했는데
그때마다 남편이 "이 책은 형이 준 건다." "'이건 열공할때 쓰던 책이라 안된다." "이 작가가 얼마나 유명한지 아느냐?"
토를 달며 꺼내놓은 책을 도로 집어 넣기 수십 차례.
딸아이 백과사전과 기타 남아있던 전집류, 매월 오는 문학잡지, 다시 들춰보지 않을 책들을
일단 꺼내놓으니 그것만으로도 족히 500권은 넘는다.
널부러져 있던 남은 책들을 빈 책꽂이에 넣으니 또다시 꽉 들어차서 원상태로 복귀.
'든자리는 몰라도 난자리는 안다'는 옛말이 있는데
우리 집 책장은 '난자리' 라는 단어 자체를 모르는 물건이다.
어쨌든 꺼낸 책을 다 처분하고 나머지는 시간을 두고 남편과 조율하기로 했다.
남편이 내게 '자꾸만 미니멀 미니멀 외치는 기세가 남편이며 딸도 곧 정리할 것처럼 보인다'고
실없는 소리를 해서 잠시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갱년기는 여자에게만 오는 게 아니라 남자에게도 온다.
남편은 갈수록 여성화(?)되어가면서 추억을 곱씹고 감상에 젖고.....그리고 홈쇼핑에 빠져든다.
한때 나도 홈쇼핑에서 물건들을 많이 샀는데.... 이젠 그게 너무 귀찮아져 버렸다. (진짜 늙은 거여?)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올해를 기점으로 좀 달라지기로 결심을 했다.
돈의 사용처를 확인하는 삶을 살기로 한 것이다.(그럼 여지껏 그걸 안하고 산 거야?????)
신혼때 가계부를 조금 끄적댔던 전적이 있긴 했지만 금세 관뒀다.
불필요한 물건을 사거나 과소비는 하지 않는다고 자신한 까닭에 날마다 생필품 가격을 일일이
적는 게 단순 노동처럼 보여서 싫었다.
그 시간에 차라리 다른 일을 하고 말지....
그 후로는 카드 내역서도 확인하지 않고 살아가는 재테크에 무관심한 삶으로 초지일관했다.
근데 올해를 기점으로
나이들어도 내가 나를 포기하지만 않으면...
모든 생활에서 조금 더 나은 삶의 방식으로 변화가 가능하다는 걸.
스스로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사실 그렇게라도 해서 '내 우울의 끝자락에 마침표를 찍고' 싶었던 거다.
그런 나의 결심이 무색하게도 '홈쇼핑 마귀'한테 이미 홀려버린 남편이
올해 초 또 다시 "저 옷, 자기가 입으면 완전 잘 어울리겠다"며 날 꼬득이는 거다.
그 꼬임에 홀라당 넘어가 밤 12시에 홈쇼핑을 시청하며 동시에 스마트 폰 앱을 켰다.
남편이 추천한 제품은 바로 리버시블 패딩 가디건이었다.
나는 이런 제품을 선호한다.
같은 값이라도 기능을 덕지덕지 붙여서 패딩도 되고 가디건도 되고, 앞뒤 뒤집어도 입고,
카라도 눕혔다 세웠다 하는.... 한마디로 사람을 정신없게 만들어서 한 벌인데도 여러 벌 처럼 착각하게 하는
그런 눈속임용 옷을 좋아한다. .
멋쟁이들이라면 절대 손도 대지 않을 아이템인데, 난 상관없다.
게다가 단돈 39000원. 이거 실화임????
요새 홈쇼핑 옷들 중 싼 거는 무지 싸다.
그래서 밤 12시 넘어 남편의 지시대로 나는 노안에 불을 밝히며 아바타마냥 앱으로 주문을 했다.
그리고 그 옷이 도착했다.
"그래. 리버시블. 기특도 해라."
그러면서 입었는데....
어라, 옷이 이상한 건지. 내 몸이 이상한 건지. 영 쫌 그랬다. 옷이 잘 안 맞았다.
예전의 나라면.... 반품이 귀찮고, 39000원이 크게 부담가는 돈도 아니어서
그런 옷은 그냥 구석에 쳐박아 두고 어쩌다 한번 입는 용도로 쓴다.
그러다 못 입으면 말고...
그런데 이젠 그럴 수가 없다.
딸아이 때문이다.
얘가 어떤 계기로 대오각성을 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인데... 초절정 절약의 아이콘으로 거듭나서
용돈을 줘도 돈을 안 받으려고 하고, (실화임)
밖에 나가서 생수 사먹는 것도 아깝다고 목말라도 참았다가 집에 와서 대접에 물 마시고 (궁상임)
생일 선물도 내년에 사주라고 안사고 (정상인 거임???)
이런 딸아이를 보면서.... 나의 경제 관념을 뒤돌아 보게 됐다.
열일곱 살 먹은 아이도 돈의 소중함을 알고 허투로 쓰지 않으려 하는데 ....
(설마 부모가 너무나도 무능력해 보이기 때문에 자신이라도 돈을 아끼려는 건가????)
나이 오십 먹은 중년 아줌마가 매달 쓰는 돈의 행방을 전혀 모르고 살고 있다는 사실이
좀 많이 부끄러웠다.
나는 새롭게 정신을 차리기로 했다.
줄탁동시라고 하지 않나.
알 속의 새끼가 알을 까고 나오려고 부리로 껍질을 쪼을 때, 어미도 바깥에서 껍질을 쪼아 주는 것.
나도 정체불명의 소비패턴을 깨고 제대로 된 현명한 소비 생활로 진화해 나가기로 결심했다.
내 딸이 내 껍질을 바깥에서 열심히 쪼아대니
'그래, 니가 내 스승이다.'
리버시블 패딩가디건을 반품 처리하고, 정말 불필요한 것들을 안 사기로 다짐했다.
그래서 올해 들어 4월 현재 나한테만 쓰이는 물건은 한 개도 안 샀고, 실행중이다.
연말까지 나는 기존의 나한테 있는 물건들을 활용하고 새것은 안 살 생각이다.
아무리 싸다고 해도 안 살 거다.
아, 근데 진짜
남편이 자꾸만 홈쇼핑을 틀어 놓고 나를 부른다.
씽크대 음식물 처리기를 사자, 건조기를 사자, 컴팩트한 식기세척기를 사자....
"아, 그만 말해. 난 안 산다고."
나한테 그렇게 구박을 먹고도
홈쇼핑 지름신이 강림한 갱년기 남성은 지치지도 않는다. 날 계속 부른다.
"29000원짜리 슬립온 판다. 자기 신으면 좋겠다. 발 엄청 편하대." (그러고보니 죄다 싼 것만 권하네.)
"아, 됐다고."
그러면서도 어느새 나도 모르게 남편 옆에 나란히 앉아 TV를 보게 된다.
쇼호스트 언니들의 말을 듣다보면 나는 '결코 그 제품을 놓치는 바보 짓' 을 해서는 안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쇼호스트 언니들 보다 내 딸의 절약 정신을 따를 거다.
뭐든 쉽게 쉽게 사고 버리며, 쓰고 남기는 물질 만능의 시대에...
아끼고 모으고 두번 세번 고민해서 구매할 물품을 정하려는
어린 딸 아이의 그 마음이 대견해서라도
경제관념에 대해 무지몽매했던 나는 돈이 귀하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다시 배우려고 한다.
그러니 아무리 싸도 내게 필요없는 건 안 살 거다.
나는 초절정 절약의 아이콘으로 날마다 진화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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