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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생각

열네 살, 신문을 읽어야 할 나이.

세계 최대 부호 3위라는 워런 버핏은 이렇게 말한다. '자신의 모든 부는 책과 신문 속에 있다.'라고. 워런 버핏은 날마다 여러 종류의 신문을 읽는 것으로 유명하다.

 

많은 부모들이 자식의 독서 교육에 신경 쓰는 것에 비해 신문 읽기에는 그다지 큰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다. 나 역시 그동안 딸아이에게 독서에 신문까지 권한다는 건 무리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사실 무언가를 읽고 생각하는 걸 누가 시킨다고 따라 하는 청소년이 몇이나 될까?)

 

그런데 남편은 신문을 정말 꼼꼼히 보는 타입이라 밑줄 긋고, 관련 내용 찾아보고, 기억하고 싶은 기사는 사진 찍고 관심없는 내게 자꾸만 이야기를 한다. 신문만큼 세상 흐름과 방대한 양의 정보를 단시간에  쉽게 알아볼 수 있는 도구는 없다고 믿는 남편인지라, 신문을 덜 보는 나와 안 보는 딸아이를 볼 때마다 안타까웠던 모양이다. 

 

그래서 나는, 딸아이가 관심가질 만한 기사를 한 두 개씩 모아 들려주곤 했다. 최근 그것을 블로그에 올리며 내 나름대로 정리를 한다. 그러다 보니 블로그에 때아니게 이런저런 연관 없는 소식들이 꼬리를 문다. 어느 날은 비닐봉지. 또 어느 날은 두꺼비 였다가 바비인형. 또 유튜브, 붙임머리, 풍선 기타 등등. 

 

몇 달 전 신문 사설을 읽다가 흥미를 잃은 딸아이의 시선에서 거부감 느끼지 않을 만한 것들을 찾는다. 게다가 가족들이 심각하지 않게 대화의 물꼬를 틀 수 있을만하면 더욱 좋고... 이런 것들이 얼마나 딸아이의 관심을 끌는지는 몰라도 시작을 했으니 천천히 함께 하려 한다.

 

나의 이런 시도에 호응을 해 준 책은 <십 대를 위한 다섯 단어>이다. 이 책의 저자는 요시모토 다카아키. 바로 요시모토 바나나의 아버지이다.  일본 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요시모토 바나나는 일본과 해외 유수 문학상을 휩쓴 유명 작가이다. 상처와 고통을 어루만지는 ‘치유와 구원의 문학’으로 한국 독자들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그런 그녀가 아버지야말로 '내  창작의 원천이며 소설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라고 말한다.

 

요시모토 다카아키는 2차 대전 후 일본 진보진영의 이념적 기반을 만든 시인이자 사상가로 유명하다. 2차 대전 이후 전쟁에 침묵하거나 전쟁을 옹호한 문학가들의 책임론을 주장하며 격렬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고 학생들과 행동을 함께 하며 사회개혁을 이끌기도 했다.   

 

'아버지는 행동과 말이 일치하는 존경스러운 사람'이라고 요시모토 바나나는 말했는데 부모 입장에서는 자식에게 들을 수 있는 최대의 찬사가 아닐까 싶다.

 

세계적 작가로 길러낸 딸에게서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요시모토 다카아키가 십 대를 위한 조언을 려주었는데 오십 대인 내가 들어도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는 열네 살부터 세상을 알아야 한다고 책의 서두를 열며 그 첫 번째로 열네 살, 신문을 읽어야 할 나이에 대해 말한다. 작가는 학교를 다니면서 문학과 화학에만 관심이 있었기에 신문은커녕 당시가 어떤 시대인지 고민하지 않고 살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수업 대신 강가에 자갈을 옮기는 일 '징용 동원'을 하게 되는데 그 이유가 일본의 태평양 전쟁 때문이었던 것을 나중에 알게 된다. 

 

본인이 하는 일과 당시 사회와의 관계에 대해 어떤 생각도 하지 않고 살았던 것을 실수라 여기며 안타까워 한다. 그 후 일본이 전쟁에 지면서 항복을 하게 되고 어린 다카아키는 충격을 받으며 인생의 허무를 느낀다. 

 

'지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며,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지, 언제나 내 나름대로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 의지와 관계없는 곳에서 사회 대변동이 일어났을 때, 그 일이 내게 생각지도 못한 큰일로 다가올 것이다. '   21쪽

 

작가는  항상 지금 시대의 모습을 스스로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큰 깨달음을 얻는데 그 판단이 때론 틀려도 상관없다고 말한다. 항상 세상의 움직임을 바라보면서 자기 나름대로의 이해를 가지고 있기만 해도 커다란 변화에 그토록 놀라 까무러칠 일은 없을 거라는 것이다. 또한 다른 사람의 생각에만 전적으로 의지하며 살아버려서 스스로의 길을 잃어버리는 허무함은 없을 거라고 충고한다. 

 

내가 모르는 어떤 곳에서 세상이 뒤집힐 만한 일이 일어났다고 해도, 

세상의 흐름을 주시하고 있었다면 내 마음만큼은 스스로 계속 지킬 수 있을 테니까요.     27쪽

 

사회의 움직임이나 시대의 흐름을 파악하는 데는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하지 않기에 모든 사람에게 공개된 정보를 종합하고 취사선택해서 사회의 모습을 파악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말한다. 

 

다양한 관점과 사고방식을 접하기 위해 여러 신문을 동시에 훑어보는 것도 권한다. 융합과 통섭의 시대라고 일컫는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능력이 바로 이것 아닐까 싶다. 시대의 흐름을 읽고 내가 가진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여 연결고리를 만들어 내는 일이 주입식으로 끊임없이 가르쳐주는 교과 공부보다 가치 있음을 느낀다.

 

작가는 또 사회 안에서 내게 주어진 역할(사회적 개인)과 고유한 성격과 내면을 가진 한 인간으로서의 역할(개체로서의 개인)을 확실히 나누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만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면서 인정받지 못하거나 상처 받는다 해도, 개체로서의 개인의 가치가 손상됨 없이 지켜진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는 아들러 심리학의 인간의 가치는 위아래가 없고 누구나 같은 권리를 갖고 있으므로 누가 누구를 수단으로 대할 수 없다는 말과 같은 의미로 이해된다. 

 

'사회가 인정해 주지 않아도 나의 가치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으며 나는 언제나 당당하게 나의 일을 하면 된다.'

 나와 딸아이가 살아가려는 삶의 방식이기도 해서 가슴에 새기게 된다. 

 

또한 직장에서 모두가 쉬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이 혼자 열심히 일하는 것은 경영자 입장에서는 좋아 보일지 모르나 같은 동료들에게는 원성을 살 수 있음을 알아야 된다고 하는데 

 

일이란 그저 맹목적으로 노력한다고 다 좋은 게 아닙니다. 

일하는 곳에서 자신의 인간성까지 평가받으려는 사람은 노력하는 그 자체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힙니다.  46쪽

 

'효율과 능력이 높은 쪽이 뛰어나다' 그것은 20세기 사회가 만들어 낸 하나의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83쪽

 

위  문장들을 읽으면서 학교에서 상위 4% 이내에 드는 모든 것을 다 갖춘 1등급 아이들과 그 아이들을 돋보이게 해주는 배경에 지나지 않는다는 나머지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겹쳐졌다. 나머지 아이들을 '들러리'로 부르기를 어색해하지 않는 교육문화가 정상인가 싶다. 

 

언제 어디를 가도 자신의 능력이 주머니의 송곳처럼 튀어나오는 소수의 사람들의 노력이 대단하기는 하다. 하지만 그 노력이 어느 순간 신성시되면서 그런 노력조차 할 수 없는 누군가를 도외시하고 소외시키지는 않았는가 곰곰 생각해보게 된다.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자유로운 의사의 힘이지. 

그 이외의 어떤 구실로 사람을 따르게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57쪽

 

양육이나 교육에 있어서 부모나 교사가 강압적 태도로 아이들의 행동을 시정하려고 할 때 제대로 효과를 보는 경우는 드물다. 나의 경우는 거의 백전백패였다. 딸아이는 자기의 생각이나 고집을 어른들이 야단친다고 해서 꺾었던 적이 거의 없다. 그래서 무섭고 강압적인 교사, 약속 안 지키는 어른들과는 늘 부딪혔고, 평범하고 무난하길 요구하는 나와의 갈등도 꽤나 있었지만, '내가 당시 아이 입장에서 더 현명했더라면....' 하는 후회가 남는다. 

 

사람은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스스로가 생각을 하는 존재이기에 자신들의 행동을 누군가의 지시나 명령으로 바꿔나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오직 스스로의 결심, 자유의지에 한해서만 부족한 행동을 바꿔나갈 수 있고 그래야만 유의미한 결과를 이끌어 낼 수 있다. 자기 나름의 생각과 판단을 바탕으로 자유의지로 행동하는 것이야말로 '진짜'라고 할 수 있다. 

 

스스로 자신을 위로하는, 자신을 존중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104쪽

 

이것은 '자기 위안' '자기에 대한 배려'로써 자기 자신이 스스로를 존중하고 격려할 수단이 있으면 그것이 글쓰기든 무엇이든 상처를 보듬을 수 있다고 말한다. 

 

세상에 대한 나만의 견해를 가지고 산다는 것은 어두컴컴한 외진 골목에 가로등 하나 켜놓은 것과 같을지도 모른다. '나만의 견해 갖기'는 결국 무언가를 읽어내는 것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내 안에 차곡차곡 쌓인 세상의 이야기와 삶의 편린들이 엮이면...결국 그게 바로 '나'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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