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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생각

산다는 건 나이 먹는다는 것 - 마흔에게

이십대나 삼십대를 살면서 '나이 먹는다'라는 생각을 한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한해 두해 지나 나이를 먹는다고 해도 외형상 티가 날 정도의 늙음을 실감하지 못할 때가 바로 그 연령대이기도 했다.

 

젊었던 나는 젊은 게 너무도 당연하여 '나이듦'에 대한 고민과 '나이 든 나 자신'에 대한 상상을 해보지 않았다. 그렇게 살다가 서른 아홉을 지나 딱 마흔 살이 되던 해에야 비로소 주춤하며 스스로를 들여다 보았다.

 

'마흔'은 스물, 서른과 달랐다. '마흔' 이라는 단어는...어감에서부터 '마음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무엇 하나 해 놓은 것도 없이 더럭 나이 먹었다는 생각에 몹시도 불안했던 때였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고민하며 공부 모임도 갖고 스스로를 채근했다. 2년 정도 즐겁게 열심히 하다보니 나름 만족할만한 결과도 얻었다.

 

그 후 마음의 여유를 가지며 내가 원하는 것들을 이룰 거라 다짐했지만, 다짐에서만 머물고 말았다. 인생은 예측불허여서 중간 중간 크고 작은 일들이 나의 삶을 휘청이게 만들었고 그때마다 나는 온갖 변명을 대며 나 스스로를 위한 시간을 가장 먼저 도려냈다.

 

'사람 때문에, 상황 때문에, 환경 때문에.... 내가 어떻게 날 위해 온전히 시간을 낼 수 있겠어???'

 

나는 이루지 못한 일들을 전부 나를 제외한 주변의 탓으로 돌리며 사십대를 불만과 불안으로 보내 버렸다. 스스로가 만족할만한 결과물을 내놓지 못한다는 점에서 초조해 하였다. 나는 현명하지 못해서 누구의 말에도 쉽사리 흔들렸고 그러니 불안은 가중됐다.

 

기시미 이치로의 책 <마흔에게>를 통해 사십대의 나는 전적으로 '뺄셈 사고'(감점법)를 하며 나 자신의 '생산성'에만 초점을 맞추었기에 행복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쟤 보다 못했으니 나의 무능 -1. 내가 원하던 걸 이루지 못했으니 나의 무능 -1.....'

 

온통 스스로에게 감점만을 주는 삶이 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까? 스스로를 점수 매기러 세상에 태어난 게 아닌데도. 많은 사람들은 자신에게 매정할정도로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다. 나 역시 오랜 시간 그랬기에 힘겨웠다.

 

아들러 심리학의 전문가인 기시미 이치로는 타자 혹은 이상적인 자신의 모습과 경쟁하거나 승부 낼 생각을 말라고 한다. 오직 지금의 자신보다 나아지기 위한 노력이야말로 '건전한 노력'이라는 것이다. 

 

아들러가 말하는 '건전한 우월성의 추구'에는 이상적인 모습에서 하나씩 지워나가는 감점법이 아니라 

자신이 쌓아 올린 것을 하나씩 더해가는 가점법으로 평가하는 눈이 필요합니다.   43쪽

 

기시미 이치로는 나이 들면서 이전처럼 활동하지 못한다고 실망하는 것은 자신의 가치를 생산성에 두기 때문인데 자신의 가치를 생산성에서 찾지 않게 되면 어떤 상황이 와도 스스로가 가치있음을 알게 된다고 말한다.

 

무언가 생산하지 못해낸다고 가치없는 게 아니라, 존재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가치있음을 알아야 한다. (갓난아기의 웃음에 부모가 행복해 하고, 아픈 부모의 살아있음에 감사해 하는 자식 입장에서는 갓난아기와 아픈 부모가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존재 자체만으로 가치 있는 것이고. 갓난아기와 아픈 부모는 충분히 그 가족들(타자)에게 공헌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아들러가 말하는 '타자공헌'이다.)

 

현자들은 이렇게 배움과 깨달음을 통해 생활 속에서 '존재의 소중함'을 느끼며 실천해 내는데 어리석은 나는 실생활에서 깨지고 피나고 다쳐 본 후에야 비로소 깨닫고 삶에 적용한다는 것이 가장 큰 차이이다.

 

'나는 무언가를 해 내서 소중한 게 아니라. 그저 '나'이기 때문에 소중한 것이다!!!'

 

젊은 시기를 인생의 시작점으로, 늙은 시기를 인생의 종착점으로 규정짓고 시간과 인생이 끝을 향해가는 움직임으로만 보는 것을 아리스토텔레스는 '키네시스'라 불렀다고 한다.

 

키네시스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무슨 일이든 빠르게 효율적으로 완수해 내는 것이 중요하며 중단되거나 방향이 틀어지는 것은 불완전한 것으로 간주하게 되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딘가에 도달하지 않더라도 그 과정의 한 순간 한순간이 완전하며 완성된 것이라는 '에네르게이아'에 대해 말한다.

 

그가 말하는 '에네르게이아'는 '이루고 있는 것'이 전부이며, 그것이 그대로 '이룬 것'이 되는 것이다. 이런 경우 시간이나 인생의 길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에네르게이아를 비유하자면 춤입니다. 춤출 때는 순간순간이 즐겁습니다. 도중에 멈추더라도 괜찮습니다. 춤이란 어딘가에 도달하기 위해 추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생도 살아 있는 '지금, 여기'가 그 자체로 완성된 에네르게이아입니다. 에네르게이아의 관점으로 살아간다면 남은 인생을 생각하며 우울해 하거나 암담한 기분이 되지 않을 겁니다. 86쪽

 

마흔의 시기를 지나 이제는 50대로 접어든 나를 어느 누구도 젊다고 부르지는 않을 것이지만 그 이전보다 덜 불안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든다. 물론 그 동안 많이 겪어냈기에 생겨난 '삶의 굳은 살' 덕도 있겠지만 다른 무엇보다 현재의 내가 지금을 살아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오늘, 내가 서 있는 이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내어 즐겁게 하는 것이 바로 완전하며 완성된 것 '에네르게이아'이다. 

지난 날의 후회와 내일에 대한 불안으로 오늘을 망치는 시행착오는 넘치도록 했다.

그러니까 '지금, 여기'를 신나게 사는 것.

그게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