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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생각

나와 내 딸과 화초의 전성기

6년 전에 이사를 하면서 텅텅 빈 아파트를 뭘로 채울까 하다가 화초를 들였다.

그 전에도 화초는 있었으나 늘 내 손에만 들어오면 죽어 나갔다.

하도 죽으니까... 화초가 꼴도 보기 싫어졌었다.

'아, 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 툭하면 죽냐??'

죽은 생명을 내 손으로 뽑아내는 건 생각보다 상당히 속이 상하는 일이었다.

빈 화분만 십여 개 넘게 창고에 쌓아 놓았다가 필요하다는 친구에게 줬었다. 

'다시는 키우지 않을 거다.'

 

환경은 결심을 손바닥 뒤집듯 만들기도 한다.

넓은 아파트를 채워 줄 품위 있어 보이는 화초 5종 세트를 홈쇼핑에서 방송하길래 얼른 주문했었다.

주문하면서 '쟤네들이 내 손에서 죽지 않는 기적이 있을 수도 있지'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6년 가까이 흐른 지금 완전히 죽고 사라진 녀석은 딱 하나이다.(지못미ㅜㅜ)

그 빈 화분에 다이소에서 파는 5천 원짜리 홍콩 야자를 심어 꽤 많이 키웠다. (뒷줄 제일 오른쪽 회색 화분)

그러니 내 손이 화초 죽이는 끔찍한 손은 아니라는 게 얼추 입증된 셈이기도 하다.

 

대신 화초의 질적 성장을 도모하는 손은 못된다. 보다시피. 화초 상태들이 비실비실하다. (갈색 화분의 테이블 야자는 화초 잘 키우는 친정엄마가 주신 거니 열외이다.) 그저 죽지 않고 연명할 수 있도록 하는 수준. 나는 딱 거기까지 인 거다. 

 

물을 많이 줘서 죽였던 숱한 화분들에게서 알게 된 교훈은 '지나친 관심은 화를 부른다'이다.

그래서 물을 적당히 줘야 하는데.... 나처럼 둔한 사람은 그 적당히를 잘 모르겠는 게 문제이다.

결국 이파리가 조금 기운이 없어 보일 때까지 관심을 끊고 기다렸다가 물을 주는 방법을 택했더니 아직까지 생존을 하고 있다.

(생명키우는데는 방목이 과도한 관심보다 수백 배 나은 방법이라는 걸 목격함)

 

처음 우리 집에 도착했을 당시, 화초들의  상태는 다 좋았다. 

5개 화분 중 아래 사진의 오른쪽 3개는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랐다. (지금은 아니다. 죽었다 살아나고 있는 중)

반면에 왼쪽에 있는 회색 화분 2개, 고무나무(키 큰 것)와 스투키(사방팔방으로 솟구친 회초리 같은 것)는

아예 성장을 멈춘 것처럼 보였었다. 

 

 

둘 다 2~3년을 아래 정도의 상태에 머물렀고 전혀 변화가 없었다.

다른 세 개의 화초가 성장할 동안 이 둘은 아무것도 안하고 물만 먹고 있는 것 같았다.  

아래 사진처럼 작고 단정했지만 자기 할 일 안하는 게으른 화초라 생각했었다.

 

네이버 이미지

 

네이버 이미지

 

그런데.... 6년 가까이 흐른 지금 보다시피 고무나무는 두배 가까이 키가 커졌고(대신 잎은 다 떨어졌고ㅜㅜ)

스투키는 허벅지에 찔리면 피가 맺힐 정도로 성질 고약하게(?) 가지치기를 했다.

외형적으로 자라지 않는 시간 동안에도 내적으로 끊임없이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 2~3년간 잘 자랐던 3개의 화분은 그때가 전성기였던 것이고

잠잠하다가 3년 이후부터 자라난 고무나무와 스투키는 요 근래가 전성기인 것이다.

 

거의 다 시들어서 죽었다고 판단했던 아래 사진의 금전수. 

돈 들어 오게 한다는 금전수가 시들시들할 때 '이러다 우리 집 망하는 거 아님?' 걱정하며

뽑아서 버려야 하나 고민했지만 더 기다려 보기로 했었다. 생명이 그리 허무하다 생각하기 싫었다. 

남편은 비실비실한 화분들을 다 정리하고 크고 좋은 화분을 들여 실내 공기 정화에 신경 좀 쓰라며 성화였다.

게다가 집안 인테리어 소품 역할도 못하고 오히려 환경 미화를 해친다고 싫어했다.

(집 인테리어에 언제부터 신경을 썼다고?? 우린 그런 거 원래 몰랐잖아~)

 

시들어간다고 거의 죽어간다고.... 죽은 건 아니다.

다시 살아날 수 없다고 죽은 화초 취급해서 내다 버리는 건 내 스타일은 아니었다.

나는 평상시 알뜰살뜰 지극정성으로 돌봐 줄 성의까지는 없는 인간이지만,

그렇다고 죽지 않은 화초를 예쁘지 않고 귀찮고 공기정화 제대로 못한다고 내다 버릴 정도로

매정한 타입도 아니라고 주장했다. 

 

극약처방으로 코스트코에서 한 박스에 6천 원인가 하는 영양제를 사서 틈틈이 꽂아 주었더니...

거짓말처럼 이 금전수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시든 줄기 사이사이로 어린 새잎과 줄기가 솟아 오르더니 스투키 옆에서 아래 사진만큼 커나가고 있는 중이다. 

 

 

남편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아래 사진의 제일 앞에 있는 직사각형 화분이다.

이 화분에서 엄청나게 잘 자라나던 알로카시아는 3년이 지나자 밑동이 물러지고 썩어서 살아날 기미가 안보였다.

하는 수 없이 뽑아서 버려야 하나 고민 끝에 윗부분의 이파리를 떼서 노랑 화분에 심었더니..

글쎄 얘도 죽지 않고 살아나더라는 거다. 더군다나 영양제 준 적도 없는데.... 알로카시아가 생각보다 생명력이 강했다. 

 

그뿐이 아니다. 

빈화분에 넘쳐나는 스투키를 옮겨 심고, 딸아이가 5년 넘게 키워 온 부러진 선인장의 줄기도 버리기 불쌍해서 심고

그러고 나서 코스트코 영양제를 집중 투하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일어난 거다. 

그 빈화분에 알로카시아 씨앗이 있었던지 연두색 고구마 줄기처럼 자라나서 키를 키워가는 중이다. 

그래서 이 화분은 한 지붕 세 가족이 되었다. 

스투키, 선인장. 알로카시아.

 

남편은 이런 정체 불명의 볼품없는 화초 집단이 어디 있냐고 구시렁대면서도

다 죽었다고 단정지어버린 화분에서 새잎을 피워내는 이 생명의 경이로움에 감동받은 게 분명했다. 

그래서 마트만 가면 영양 흙을 사라, 영양제를 더 사라... 요구사항이 많다. 

그걸 사서 골고루 뿌려주고 날마다 영양제를 꽂아주고 지켜보다가 잎이 시들시들할 때(?)  물을 준다.

(물 잘못 줬다가는 다 전멸이다.)

 

 

같은 날 우리 집으로 들인 5개의 화초도 본래 타고난 성질대로...

자신들만의 속도로 상태를 유지하기도, 자라기도, 시들기도, 죽어가기도, 죽은 것 같다가 다시 살아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다 포기하고 화원에서 더 크고 좋은 식물로 분갈이를 해 버렸다면...

집안 인테리어와 공기 정화에 도움 주는 그럴싸한 화초를 새로 들이면서 얘네들을 내쳐버렸다면...

절대 느끼지 못했을 감동과 가르침을

이 화초들이 내게 주었다.

 

 

왜 우리는 성공하려고 그처럼 필사적으로 서두르며, 그처럼 무모하게 일을 추진하는 것일까?

어떤 사람이 자기의 또래들과 보조를 맞추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마 그가 그들과는 다른 고수의 북소리를 듣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듣는 음악에 맞추어 걸어가도록 내버려두라. 

그 북소리의 음률이 어떻든, 또 그 소리가 얼마나 먼 곳에서 들리든 말이다. 

그가 꼭 사과나무나 떡갈나무와 같은 속도로 성숙해야 한다는 법칙은 없다. 

그가 남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자신의 봄을 여름으로 바꾸어야 한단 말인가. 

 

 <월든> 헨리 데이빗 소로우

 

 

세상 모든 사람은 다 자신들만의 고수가 내는 북소리를 들으며 춤을 추고 살아간다.

각자의 계절을 묵묵히 살아내며 다가오는 자신들만의 전성기를 담담하게 맞이한다. 

나와 내 딸에게는 지금이... 전성기일 수도, 아직 오지 않은 전성기를 기다리는 시기일 수도 있다.

다만 전성기가 없을 거라는 단정만큼은 안 할 거다.

 

화초에게도 각자 나름대로 스스로의 성장을 폭발적으로 증폭시키는 시기들이 있는데

하물며 사람에게 그러한 시기가 없을리 없다.

또한 그러한 시기가 특정 부류의 사람에게만 선택적으로 몰려 있을 리 없다.

인간을 만들어 낸 이 우주가 그렇게 편협할 리 없다고 믿는다.

인간 모두에게 각자의 고유한 성질대로 살다가 스스로를 성장시킬 순간 순간들을 분명히 심어주었을 것이다. 

 

그러니

오늘도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이 내 성장을 위한 가장 어리고 젊은 날이라는 걸 깨닫고 무엇이든 하려 한다.

이야기도 좋고, 독서도 좋고, 정리정돈도 좋고, 음악 감상도 좋고, 산책도 좋다.

우리가 움직이는 한, 생각이라는 걸 멈추지 않을 것이고

그 생각이 오늘 우리를 티나지 않을 정도로 조금씩 조금씩 키워줄 거라고 믿는다.

 

크고 화려해야만 전성기라고 누가 그러는가.

다 죽고 뽑혀 나간 알로카시아 화분에서 남은 씨앗이 싹을 티워 다시 자라게 될 줄 어찌 알았을까.

다시 자라나는 작고 여린 알로카시아를 보며 '에게. 이게 무슨 전성기????' 이러지는 말자.

크고 좋은 다른 것 또는 누군가와 비교해 자신의 전성기를 가늠할 것이 아니다.

자기 안의 능력을 소신껏 마음대로 피워낼 때. 그때가 바로 전성기인 것이다.  

 

죽어도 죽은 게 아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신나고 행복하게 살면서 우리의 전성기를 기다리면 된다.

화초들이 내게 준 가르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