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한마디로 천냥 빚도 갚는다고 하지만
그 말 한마디 잘못해서 타인에게 상처를 주어 평생의 견원지간이 되기도 한다.
누구나 한두 번쯤은 말실수를 한 적이 있을 것이다.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불필요한 이야기는 가끔씩 설화(舌禍)를 몰고 와서 곤경에 처하게 만들기도 하니까.
말을 아나운서처럼 잘할 필요는 없으나
인간관계 속에서 나를 드러내고 남을 이해하는 편리한 수단으로 '말'이외에 무엇이 있을까 싶다.
그만큼 말이 중요한 시대에 말을 잘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과 강의들도 많다.
내가 읽은 <말의 내공>은 말을 잘하기 위한 첫 번째 단계로 <수양>을 강조한다.
고개가 끄덕여진다.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서로가 서로의 성품과 교양과 사려깊음의 정도를 알 수 있게 된다.
말 잘하는 것은 결국 나에 대한 성찰과 타인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해야 가능한 것이다.
말 한마디에는 말하는 이와 듣는 이 모두의 삶이 참여한다.
먼저 화자의 삶에 따라 말의 의미와 표현이 결정되고, 그것들은 또다시 청자의 삶을 고려해 조정되기 때문이다.
이 과정 없이 말은 탄생할 수 없다.
말을 '잘한다'는 것은 단순히 화술이 능수능란한 상태를 이르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해 성숙해져 있고,
타인에게 관심을 기울여 이해하며, 어떤 상황을 읽는 안목까지 갖춘 총체적인 상태를 이른다.
그리고 그에 도달하기 위한 노력의 과정이 '말공부'다.
작가는 <수양> <관점> <지성> <창의성> <경청> <질문> <화법> <자유>의 단계를 거쳐
더 나은 삶으로 도약한 <실전>에서 말하기의 좋은 사례를 보여준다.
그중 석가모니의 일화가 나오는데 깊은 울림을 준다.
석가모니 생전에 대장장이 아들인 춘다 라는 이는 때마다 공양을 바친 모양이다.
공양이란 수행자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것인데 이는 공덕을 쌓는 귀한 행동이라고 한다.
그래서 춘다는 여유가 될 때마다 석가모니와 그의 제자에게 음식을 바쳤는데
하루는 공양한 버섯요리가 상한 것이었다. 더운 인도에서는 종종 있는 일이었다.
먼저 음식 맛을 본 석가모니는 제자들이 먹지 못하도록 버섯요리를 땅에 묻으라 했다.
그 후 자신은 속병에 걸리게 되고 급격히 쇠약해져서 얼마 되지 않아 죽음을 맞게 된다.
임종을 앞둔 석가모니가 제자 아난을 불러 유언을 남겼다.
"아난아, 대장장이의 아들 춘다가 이렇게 스스로를 힐난할지 모른다.
'내가 드린 음식을 먹고 부처님이 죽게 되었으니 이것은 전적으로 나의 잘못이고 나의 불행이다!'
그러나 아난아, 춘다에게 이렇게 말해 죄책감을 없애 주어야 한다.
'벗 춘다여, 부처님은 그대가 드린 음식 탓에 죽는 게 아니라,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그대의 음식을 드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대는 죄를 지은 게 아니라, 가장 큰 공덕을 지은 것입니다.
이는 내가 부처님께 직접 들은 말씀입니다.'
이렇게 춘다의 자책감을 없애 주어야 한다."
<대반열반경>에서
누군가의 진심을 건드리는 것은 세련된 화술이 아니라 그 사람 삶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같은 말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가치가 다르며 일반인과 성인의 한마디 역시 천지 차이이다.
그러므로 스스로를 갈고 닦는 수양에서부터 말의 공부는 시작되어야 한다고 작가는 조언한다.
가족들에게 가끔씩
나의 불편한 감정을 꾹꾹 눌러 담아 말을 하게 될 때가 있다.
내 상황을 이해 못해 주는 가족들을 원망하는 마음이 있을 때면 말이 더욱 곱지가 않다.
말을 투박하게 할 게 아니라
내 마음 불편한 이유를 설명하며 행동의 시정을 요구하는 편이 더 나은 방법일 텐데
그렇게 되지 않는다.
그러니 돌아서고 나면 남는 것은 후회뿐이다.
스스로 성찰하며 자존감을 기르고 감정을 경영하는 수양이 부족한 탓이다.
부족한 것을 느끼니 늘 채우고 배우는 자세로 살아가려 한다.
주말 동안 가족들과 서로를 보듬고 토닥여 주고 응원해 줄 말들만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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