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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생각

새들의 추락을 보는 우리의 자세






얼마전 고속도로를 지나는데 방음벽에 그려진 새그림을 보고 딸아이가 물었다. 

방음벽에 새그림이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는데 그 차이는 무엇이냐고. 


"관심의 차이? '새 스티커'를 붙이지 않은 벽이 새들에게 얼마나 위험한지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무관심." 


일괄적으로 투명방음벽이나 건물의 투명 유리창에 

'새 스티커'나 '충돌방지용 불투명 스티커'를 붙이도록 할 수 없는 모양이다. 

관련법이 없어서 강제하지 않으니 어느 방음벽에는 스티커가 있고, 또 다른 곳에는 없다. 

날아다니는 새들이 스스로의 목숨을 복불복에 의지해야 하는 셈이다. 


고속도로 뿐만 아니라 아파트나 학교 주변에 투명 방음벽을 설치한 곳도 많다. 

투명 방음벽의 장점은 소음을 방지하면서도 시야 확보는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장점이 치명적 단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바로 증가하는 '새들의 추락사'가 그렇다. 

새들이 투명방음벽 너머의 하늘과 숲의 모습을 실제 모습으로 착각하여 

방음벽으로 그대로 돌진해버렸기에 일어난 사고들이다. 

이런 방음벽은 건물 유리창보다 더 위험한 것이 양쪽에서 새들이 충돌하기 때문이다. 


그 사고를 막고자 '새 스티커' 일명 '버드 세이버'를 설치한다. 

맹금류를 본따 투명창에 붙여 놓음으로써 날아다니는 새들의 경각심을 일깨우려는 의도이다. 

그러나 이런 스티커가 투명 방음벽에 띄엄띄엄 붙어 있으면 효과는 떨어진다. 

좀더 조밀하게 붙여놓아서 날아다니는 새들이 

가짜 맹금류를 보고 놀라서라도 방음벽을 피해가도록 해주어야 한다. 

  



  



아파트 경관을 해친다고 어쩌다 한마리 장식처럼 붙여놓는 

'버드 세이버'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새들이 넓디 넓은 방음벽 중에서 딱 한마리 그려져 있는 저 맹금류를 보고 

놀라 도망칠 확률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저 투명방음벽만 없어도 새들이 충돌 추락사할 일은 많이 줄어들 것이지만,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설치를 해야 한다면 

투명 방음벽 설치시 조밀한 '버드 세이버' 부착 역시 필수적으로 해야 할 것 같다. 

커다랗고 검은 맹금류의 형상을 덕지덕지 붙이는 것이 혐오스럽다 생각이 들면, 

자외선을 반사하는 불투명 테이프나 줄을 늘어뜨려서라서 새의 충돌을 막을 수 있다. 

사실 하려고만 한다면 방법이 없겠는가? 하려는 의지가 없는 것이지. 


전국의 건물이 700만 채가 넘는다고 하는데 

건물마다 유리창이 있고 그 유리창으로 돌진하여 

목숨을 잃는 새들과 투명방음벽에서 희생당한 새들의 수는 

1000만 마리 이상이 될 것이라고 한다. 


"새, 그놈 참 답답하네. 유리 피해가면 될 거 아냐?"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을 듯 한데...

새들에게 투명창과 유리는 장애물이 아니라 텅 빈 공간으로 인식될 뿐이라고 한다. 

새는 나무가 있다고 그 나무 꼭대기까지 넘어 날아다니지 않는다. 

그저 나뭇가지 사이를 날아다닐 뿐이다. 


그것은 에너지를 아끼기 위한 생존 본능과도 같은 것이다. 

사람들이 먼길과 지름길 사이에서, 지름길을 선택하는 것을 보며

답답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러니 새대가리라고 조롱하며 죽어도 싸다고 생각하는데 에너지를 쓸 것이 아니라, 

그 에너지를 아껴서 새를 살릴 방법을 강구하고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생존을 위해 허우적대다 나뭇가지에 걸려 죽는다면, 

천적을 피해 날아가다 죽거나 먹이가 된다면... 

그런 죽음은 자연의 법칙이라는 범주 속에서 이해 가능하다.


하지만

유리창에 부딪혀 죽는 새!  

이건 정말 민망할 정도로 인위적이지 않은가 말이다. 

사람들의 조그마한 관심이 무수히 죽어가는 새들을 살릴 수 있다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직접 죽이는 것과 무엇이 다른 건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