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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생각

담쟁이처럼 벽을 오른다

 詩에서 위로를 받던, 지금보다 훨씬 젊었을 때가 있었다. 

산문이나 소설의 이야기에서 주는 위로와는 성격이 다른

농도짙은 시어들이 얼은 가슴을 매만져 주던 때가 있었다. 

 

후배가 얼마전 괴로운 일이 있다고 연락이 왔다.

살다보면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고통의 순간이 있다.

그저 시간이 흘러가 주기만을 바라며 맥놓고 있는 게 전부인 순간.

내게도 그런 순간들이, 인생 구석구석 점점이 박혀있다. 

 

언젠가 아주 힘들었던 날.

거리를 하염없이 걷다가 한 건물의 벽을 뒤덮고 있던 담쟁이를 보았다. 

땅에서, 화단에서 자라는 수많은 식물들과 다르게

기어이 눈 앞의 벽을 타고 올라가 '존재'를 증명해 보이는 담쟁이를 보며

집요함의 끝에 있는 질긴 생명력을 떠올렸다.

나도 살아 있는 한, 담쟁이처럼

내 앞의 꽉 막힌 벽을 기어 올라야겠다는 마음을

겨우겨우 내 볼 수 있었다. 

 

그 즈음 만났던 시가 도종환의 담쟁이다. 

 

 

 

담쟁이.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https://pixabay.com/

 

후배에게 그저 메일로 시 한편과 내 마음 몇 줄 담아 보내 주었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으면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는 순간이

반드시 온다는 믿음과 함께.

 

 

https://pixabay.com/

 

태백산맥을 쓰신 조정래 선생은, 시는 소설보다 상위문학이라고 하였다. 

부인 김초혜 시인의 시는 조정래 선생의 소설보다 낫다....라고

단적으로 말할 수는 없으나

조정래 선생은 알고 계셨던 거다.

어떤 상황을 표현해 내는데

시만큼, 의미있고 함축적이며 간결한 문학적 수단이 없다는 것을.

그리고 그 시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위로 받고 있다는 것을.

다 알고 계셨던 거다.

 

도종환 시인의 작가의 말을 읽으며 

시인들이 시어를 빚어내는 과정이 흡사 수행하는 과정과

비슷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뜨거운 시간이 지나간 뒤에 더는 참을 수 없어 쏟아지는 빗줄기처럼

시는 제게 그렇게 다가왔습니다. 

시가 빗줄기처럼 쏟아져 저를 때리면 저도 그 비를 다 맞았습니다.

치열하지 않으면 시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절절하지 않으면, 가슴을 후벼 파는 것이 아니면, 울컥 치솟는 것이 아니면

시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내 가장 뜨거운 순간이 담겨 있지 않으면, 간절한 사랑과 아픈 소망이 아니면

시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30년 가까이 시를 썼습니다. 

그래서 제 시에는 빗줄기처럼 쏟아지는 이야기들이 들어 있습니다. 

골짜기 물처럼 말들이 넘쳐흐르곤 합니다. 

더 많은 진정성을 담고, 더 경건해지고자 말들이 두 손을 모으는 때가 많습니다."  

 

도종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작가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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