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광수생각' 만화로 유명했던 박광수는 어렸을 적 도벽이 있었다고 한다. 집안 물건과 형들의 물건까지 닥치는 대로 가져다 팔고, 얻은 돈으로 친구들과 놀았던 모양이다. 이런 도벽을 없애고자 부모님이 용돈도 올려 줘 보고, 큰 형에게는 흠씬 두들겨 맞기까지 했음에도 이 도벽이 고쳐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박광수가 이층의 셋째 형 방에서 자고 있는데 아랫층에서 어머니와 둘째 형이 싸우는 소리가 들려 내려가게 된다. 박광수가 집안에 있는 줄 미처 몰랐던 두 사람은 '박광수의 도벽' 때문에 말씨름을 하고 있었던 거다. 미대생 둘째 형이 아끼던 카메라가 없어지자, 어머니는 범인을 '박광수'라 단정해 버린다. 그러고나서 박광수 발견시 혼쭐을 내겠다고 말하는데, 둘째 형이 그런 어머니를 나무라며 큰소리가 오갔다.
"엄마가 물건만 없어지면 막내를 다그치니까 막내가 더 삐뚤어지는 거예요. 저도 더 찾아볼 테니 일단 확인이 되기까지는 믿어주자고요." 54쪽
그 말을 들은 박광수는 아랫층의 자기 방으로 가지도 못한 채 다음 날까지 셋째 형 방 다락에 틀어박혀 있으면서 울었다. 왜 울었을까? 둘째 형 카메라를 훔쳐다가 청계천 장물아비에게 판 작자가.... 바로 '그' 였기 때문이다. 미안함과 더불어 자신을 믿어준 둘째형에 대한 고마움 등의 복합적인 감정이 북받쳐 울음을 터트렸을 것이다. 그런 후 그는 도벽을 싹 고쳤다.
겨울 눈 쌓인 골목길에서 노상 방뇨를 한다.
도무지 녹을 것 같지 않은 눈들이 내 소변에 녹는다.
지퍼를 올리며 너무나 당연한 생각을 한다.
뜨거운 것들은 세상의 모든 차가운 것을 녹인다.
그런 마음으로 산다.
뜨거운 마음으로 55쪽
지저분한 오줌이 도벽에 빠진 청소년의 눈물과 오버랩되자 꽁꽁 언 세상이 일순간 녹아 내린다. 서사의 힘이다. 머릿속에 겨울날 길 모퉁이에 서서 오줌 누는 사내 녀석의 뒷모습이 자꾸 그려지는데도.... 달려가서 뒷통수 후려치고 싶다는 생각이 안든다. 희한하게도 드럽다는 생각보다 진짜 뜨거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 모든 기존의 것들이 이야기를 만나면 '전혀 없던 새로운 것'으로 태어나 재해석된다. 그러니 내게 다가온 '어떤 의미'는 그것이 설사 아주 여린 하나의 가닥일지라도 놓치지 않고 간직해야겠다. 소중하게...
이 책을 읽다가 박광수가 '광수생각'의 그 광수가 맞나 싶게 반전이 꽤 있었다. 뭘 훔치고, 말더듬는 친구 놀리며 따라하다가 말더듬는 버릇을 갖게 되고, 젊은 세대에게 이런 세상 물려줘서 미안하다는 사람들을 보고는 '그게 위로냐, 조롱이냐'며 반문인지, 분노인지 모를 말을 하고 그러다가도 봄을 애틋하게 기다리고, 새로운 노년 인생을 맞는 누군가를 응원하고, 치매 걸린 어머니를 떠올린다. 한 사람의 속살이 그대로 드러났다가 겉살로 덮었다가 또 다시 속살 아래 뼈가 도드라져 보이기도 하는, 짧은 이야기들과 그림들을 보면서 그 사람이 궁금해졌다.
치매 엄마를 보면서 엄마가 해주는 반찬을 못 먹게 된 것이 슬펐다는 박광수는 어느 날 무짠지를 해 먹을 결심을 한다. 그때까지 요리 한번 해 본적 없던 그는 오로지 본능과 기억에 의거, 엄마의 무짠지 맛을 떠올리려 무를 채썰고, 천일염에 재우고, 고춧가루와 마늘을 집중 투하한다. 부족하다 싶으면 또 다시 사그라드는 기억에 부채질하여 멸치액젓, 설탕, 매실액도 넣고 그래도 안되면 쪽파와 양파도 넣는다. 내가 볼때 그는 집에 있는 거, 손에 잡히는 거면 음식에 다 넣어 볼 기세다. 어쨌든 다 넣고 나서 그의 말마따나 버무리 버무리 하면 끝. 하루 반나절 상온에서 익혔다가 맛을 본 박광수는 눈물이 난다. 엄마의 무짠지와 얼추 비슷한 싱크로율을 구현해 냈기 때문이다.
엄마가 만들었던 그것과는 다르지만 그 맛이 엄마가 만들었던 무짠지의 맛과 대략 70% 정도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 맛은 엄마를 따라 시장에 나가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 엄마의 치마를 꼭 잡고 따라 다니던 맛이었다. '내 혀가 기억하고 있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자 어디에서든 곧잘 실언을 해서 늘 밉기만 하던 내 세 치 혀였는데 처음으로 고맙고 대견스러웠다. 그리운 맛의 안내자는 엄마의 음식에 오랫동안 길들여진 내 혀였다. 234쪽
엄마의 음식을 재현하기 위해 박광수는 그 뒤로도 계속 기억을 소환하며 요리를 했고 자신의 새로운 재능을 발견하게 된다. 어떤 음식을 만들기 전에 눈을 감고 만들려는 음식을 생각해 내고, 가장 맛있었던 순간을 떠올린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기본적인 레시피에 본인의 창의성을 덧붙인다고 말한다.
완성된 음식의 맛은 개인이 첨가하는 재료에 따라 많이 달라진다. 맛있고 맛없고 그리고 어떤 맛인지가 음식을 만들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겠지만, 어쩌면 크게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게 상상력을 발휘하며 만든 음식은 대체로 맛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나는 '내가 해냈다'라는 느낌만으로도 충분히 맛이 있었다. 236쪽
박광수는 요리하는 것과 인생이 비슷하다고 말한다. 한번에 완성되는 음식 없듯 한번에 완성되는 인생도 없다고...경계해야 할 것은 '음식 못해'라고 단정짓고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이라고....
요리를 수십 년째 하고 있지만 상상력이 모자라고 창의성이 부족한 나는 여전히 요상한 맛을 내며 모양도 기기묘묘한 음식을 만들어 낸다. 박광수 말대로 '내가 만든 음식을 내 인생과 연결'지어 '흡사하다 또는 크게 다르지 않다' 라고 생각하려니 갑자기 급우울해진다. 정신 차려야 한다!!!!! 아침부터 이런 식으로 기운을 빼면 하루를 그냥 드러누워 방바닥과 한 몸인 채로 지내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내가 만든 음식보다는 내 인생의 맛이 조금 더 났다고 믿기로 한다. 대신 이것 하나는 명심하자고 다짐한다. 음식이건, 인생이건 둘 다 내 손에서 만들어지는 것인데 될 수 있는대로 즐겁게 만들어 보자고..... 때론 화나고 짜증나고 귀찮고 실망할 수도 있을 테지만 다시 요리하기 위해 가스불 앞에 서거나, 다시 일어서기 위해 신발을 꿰어 신을 때는 전에 없던 새마음을 내어 힘껏 시작해 보자고.....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여 본다. 그렇다면 지금, 아침하러 가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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