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언니랑 시간을 맞춰 엄마를 뵈러 갔다. 엄마도 편찮으시고 나도 몸이 아파서 서로 못 본지 오래였다.
그 사이 엄마는 더 쇠약해지신 것 같았다. 당연한 일인데도 어쩌다 만나는 엄마가 좀 더 천천히 늙으셨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정작 내가 늙는 건 계산에 집어 넣지 않는다. 딸인 나는 갈수록 늙으면서 엄마는 늙지 말라고 하면, 뭐 어쩌겠다는 건가? 모녀지간이 아닌 자매지간을 바라는 것도 아니면서....
엄마 연세가 올해 여든 둘이다. 작년 6월 까지만 해도 정정하셨던 것 같은데 그 후부터 지금까지 갑자기 많이 늙고 약해지셨다.
세월 앞에 어느 생명체가 한결 같겠냐마는 엄마가 늙어가는 걸 볼 때면 쓸쓸해진다. 결국 이렇게 지내다가 별다른 일이 없는 한 엄마를 여의게 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긴 태어난 순서가 정해졌다고 해서 떠나는 순서도 그렇게 되리라는 법은 없지만, 그럴 확률이 더 큰 것은 사실이니까)
우리는 점심식사를 마치고 선정릉으로 산책을 갔다.
중고등학교때 근처 선정릉으로 사생대회며 소풍을 가게 되면 얼마나 싫어했었는지 모른다. '하필 왕의 무덤이 학교 옆에 있어서 툭하면 여길 걸어 오게 하냐?'며 아이들은 날마다 불평을 했다.
16,17세란 사소한 것에도 불만이 터져나오는 그런 나이다. 30여년 후에는 선정릉을 좋아하게 될 수도 있다는 상상따위는 할 수 조차 없는 그런 나이.
나이가 든다는 건 싫어했던 것도 좋아지는 걸 의미한다. 취향이 변했다기 보다는 세상을 바라보는 삶의 자세가 유연해진 것일 테다.
나이 든 선정릉은 그때보다 훨씬 울창해졌다. 나무들이 찌를 듯 하늘로 솟구쳐 있었다. 자연은 그런가보다. 세월이 흐를수록 더 굵어지고, 더 길어지고, 더 풍성해지고, 더 짙어진다. 사람이 나이드는 것과는 정반대이다.
엄마는 예전보다 더 가늘어졌고, 더 쪼그라들었고, 더 빈약해졌으며, 더 희미해졌다. 외형상으로는 그랬다. 엄마뿐 아니라 언니도 그랬고 나도 그랬다. 팔순 노모에 어울리는 쉰이 훌쩍 넘은 딸들이었다.
그러나 자연의 섭리가 오직 인간만을 배제하고 작동하는 것은 아니리라. 그러니 숲이 나이 들수록 울창해지는 것처럼 사람도 그렇게 빽빽해지고 깊어지는 것이라 믿고 싶다.
그렇지 않다면 비록 육체는 쇠약해졌으나 마음과 정신은 갈수록 또렷해지고 현명해지는 팔순 노모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엄마를 만나고 오면 내 안의 고민의 농도가 옅어진다. '그깟것 아무것도 아니야. 사는 거 다 똑같아.' 그렇게 몸과 마음으로 가르쳐 주는 엄마만큼 든든한 의지처가 어디 있을까.
나이든다는 건 커나가는 것이다. 나무가 제 몸집을 쑥쑥 키워내듯 사람은 제 자아를 부풀려 간다. 정체성을 지닌 한 인간의 완성을 엄마에게서 본다.
나이들수록 깊어지고 풍요로워진다 생각하면 늙음이 꼭 슬픈 것만은 아니다. 비록 아프고, 불편하고, 힘에 부쳐도 그 과정 중에 우리는 커져 간다. 우리의 내부가 더 탄탄해지고 믿음직스러워진다.
노력하는 한, 나이드는 것만큼 삶도 싱그럽고 울창해질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일에도 끄덕없는 그런 삶은 아닐지라도.. 쓰러지면 일어서고, 또 쓰러져도 다시 일어서는 우리가 될 터이다.
결국은 그렇게 될 것이다
참여하고 있는 밴드에서 누군가가 올려준 글, 그림이다. 나이든다는 것이 무엇인지 자꾸 생각해 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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