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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생각

거리를 두면 보인다

아주 오래 전 대학생때 프랑스에 간 적이 있었는데 파리에서 친구들끼리 서로 번갈아 사진을 찍어주며 시간을 보냈었다. 당시만 해도 지금으로부터 거의 27-8년 전인지라 핸드폰은 당연히 없었고 필름 카메라에 의지해 사진을 찍었다. 아예 출국때부터 필름만 몇 십통 가지고 갔었던 것 같다. 내가 프랑스에 또 올 일이 있겠어???? 하면서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구경하고 기념 사진을 찍은 후 귀국했다. 사진관에 필름을 맡기고 며칠이 지나 사진을 찾았는데... 사진들이 대체로 다 엉망이었다. 요즘처럼 디지틀 카메라였다면 화면을 보고 마음에 안드는 장면을 삭제했겠지만 그 당시에는 선택에 여지가 없으니 찍으면 찍는대로 잘 찍혔겠거니 생각하며 믿을 도리밖에 없었다. 그러고는 연이어 다음 장소로 이동만 할 뿐이었다. 

가장 황당했던 사진은 개선문 앞에서 찍은 것이었다. (오래전 사진들이 어딘가에 있긴 할텐데 찾지 못해서 네이버 사진으로 대체한다. ) 개선문은 내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컸다. 가로 세로 거의 50미터에 달하는 이 건축물은 근처의 관광객들을 전부 개미처럼 보이게 할 정도였다. 

 

네이버 이미지

 

개미같던 우리들은 열심히 구경한 다음 옆에 있던 다른 관광객들처럼 사진을 막 찍었다. 그런데 현상하고 보니 개선문은 어디로 가버리고, 우리는 죄다 웬 담벼락 앞에서 폼만 잡고 있는 거였다. '사진을 뭐 이렇게 찍었냐??? 개선문은 대체 왜 없는건데?? 이거 찍은 인간 누구였지???' 하며 친구들을 번갈아 원망했던 기억이 있다. 그 담벼락 사진이 개선문 앞에서 찍은 거라는 건 우리들만 아는 비밀이었다. 

그로부터 또 6-7년이 지나 프랑스에 가게 되었고 그때도 개선문에 다시 들르게 되었다. 그런데 일행 중 한사람이 개선문 쪽으로 가지 않고 아주 멀찍이 떨어진 길로 사람들을 안내했다. 그에게 이끌려 간 그 곳에서 바라본 개선문. 한 눈에 전체 개선문의 외관이 다 보였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어떠한 것의 전체적 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바짝 붙은 지점, 곁에서는 결코 불가능하다는 것을. 20대 초반의 나는 같은 개선문을 보고도 담벼락의 일부만을 볼 수 있었는데, 30대로 들어선 나는 온전한 개선문을 한 눈에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이 사진찍는 장소는 바로 개선문에서 뚝 떨어진 가로등이 있는 곳이었다. 멀찍이 떨어진 곳. 거기에서 나는 일정 수준의 거리를 반드시 두어야만 사물이든, 사람이든 그들의 실체를 온전히 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돌아왔다.

 

네이버 이미지

그 후 20년 가까이 나는 때론 거리두기에 성공하기도 실패하기도 하며 살아왔지만 언제나 머릿속에는 그 생각이 있다. 너무 가까이 있으면 모든 것이 들러붙어서 형태가 이지러져 보일 수 있다고. 그러니 적당한 간격 유지, 거리 두기는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기 위한 최선책일지 모른다고.

우리집 식탁은 주방 벽면 앞에 몇년째 그대로 있었다. 식탁으로서의 용도보다는 아이와 앉아서 컴퓨터를 하거나 책을 읽는 용도로 사용했었는데... 우리는 날마다 벽 앞에만 앉아 있었다는 사실을 얼마전에야 인지했다. 면벽수도도 아닌데. 내가 무슨 벽보고 수행할 정도나 되나? 싶었다. 그 전까지 신경도 쓰지 않았던 벽이 갑자기 너무 답답하게 다가왔다. 

그래서 식탁을 낑낑대고 끌어다가 거실 유리창 앞으로 옮겼다. 그랬더니 보이지 않던 바깥 세상이 창문 너머로 성큼 다가왔다. 멀리 바다도 보였다. 몇년 째 살던 집에서 그제야 비로소 새로운 세상 하나를 발견해 낸 것이다. 변하고 싶다는 내 욕구가 만들어낸 새 세상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식탁의 좌 우가 3센티나 차이 날 정도로 기울어져 있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주방에 있을 때는 식탁이 기울여져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거실 창가로 식탁을 옮겨 멀리서 바라보니 기울어짐이 한 눈에 보였다. 원인도 알아냈다. 오랜 시간 과도하게 쌓아올려 놓았던 책들의 무게를 식탁이 견뎌내지 못했던 거다.

많은 책들을 식탁에서 내리고 당장 볼 책 한 두권만 올려 놓기로 했다. 거리두기를 하지 않았다면 우리 집 식탁은 무거운 책들로 인해 오늘도 한쪽으로 조금씩 조금씩 기울어졌을 것이다.

삶도 그렇다. 어느 한쪽으로의 과도한 치우침이 없으려면 자주 들여다 보고, 띄엄 띄엄 보기도 하고, 가끔은 멀찍이 떨어져 보기도 해야 한다. 제대로 보아내려면 그 방법 뿐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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